순창인물(11) 의를 실천하고자 갈등했던 신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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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11) 의를 실천하고자 갈등했던 신말주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06.19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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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우리는 매순간 선택의 기로에 선다. 특히 사회나 국가 지도자들의 경우 자신들이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구성원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러한 선택의 중요성은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 역사 속 라이벌들에게서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성삼문과 신숙주,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의 라이벌이다. 두 사람 모두 세종 때 한글 창제에 크게 기여했던 집현전 학사들이다. 그러나 문종 사망 후 어린 단종이  재위하는 기간, 이들의 선택은 달랐다. 수양대군(세조)의 왕위 찬탈에 분개해 의를 지키려다 형장에서 온몸이 갈기갈기 찢긴 사육신 성삼문, 그리고 수양대군의 거사에 참여해 세조에서 성종 때까지 두 번씩이나 영의정에 오르며 국가의 문물정비에 기여하기도 했던 신숙주.

 

두 임금을 섬길 수 없었던 신말주와 귀래정

 

신숙주의 막내 동생이 신말주이다. 신말주(申末舟, 1429∼1503)는 세종 11년에 5형제 중 막내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자즙(子楫), 호(號)는 귀래정(歸來亭)이다. 할아버지는 공조참의 신포시(申包翅), 아버지는 공조참판 신장(申檣)이며 어머니는 정유(鄭有)의 딸이다. 그는 어린 임금이었던 단종 2년(1454년)에 생원시에 합격해 벼슬길에 들어섰다. 그의 나이 25살이었다. 그리고 이듬해는 원종공신에 올랐으며 대사간에 이른다.
그런데 그가 모시던 어린 임금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는 사건은 그에게 견디기 어려운 상처로 다가왔다. 셋째 형 신숙주가 공신으로 출세를 거듭하는 동안이었지만 동생 신말주는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이 부도덕하다 여겨 사간원 우헌납의 벼슬을 버린다. 그리고 찾아 든 곳이 처 설씨부인의 고향인 순창 남산마을이었다. 그리고 27세 때인 1456년 귀래정(歸來亭)을 세웠다. 정자의 이름은 서거정이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인용해 지었고 신말주의 호(號)가 되었다.
아미산에서 걸어와 경천을 내려다보듯 엎드려 있는 남산의 귀래정. 솔잎 위에 내려앉은 학의 날개처럼 처마는 가볍고 학의 다리처럼 기둥이 매끄러운 3칸짜리 정자다. 귀래정은 담양 면암정과 함께 조선시대 최고 정자 중의 한 곳이다.

절개를 실천한다는 것의 어려움

그가 남산대 귀래정에 앉아 세상을 잊고자 했던 절절한 마음이 칠언율시 한 편에 담겨 있다.

듣자하니 전원에서 청산을 대하여/ 세상을 잊은 채 한가히 누워 일찍이 기미를 잊었네/ 시냇가에 갓끈을 씻으매 찬 기운이 뼈에 사무치고/ 소나무 사이에 지팡이 기대니 이슬이 옷을 적시네/ 문밖에는 팽택의 버드나무 그림자 드리우고/ 울타리 가엔 수양(首陽)의 고사리가 뿌리를 내렸네/ 도서가 벽에 가득 속진의 종적 끊어지고/ 오직 한 산승이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리네

제6구의 ‘수양(首陽)의 고사리’가 눈에 띈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두 형제는 은나라(상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의 신하였다. 주나라의 무왕이 무력으로 은나라를 멸하자 신하국인 주나라가 상국인 은나라를 멸한 것은 인(仁)에 어긋난다며 “주나라의 무왕은 군자가 아니다. 무왕이 다스리는 주나라에서 자라는 어떤 것도 먹지 않겠다”며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살다 마침내 굶어 죽은, 충절의 대명사다. 
성삼문은 “수양산(전설의 산 이름이자 수양대군을 가리키기도 하는 중의적 표현)을 바라보며, 백이와 숙제를 한탄하노라.∼”라는 시조에서 주나라 땅에서 생산된 고사리를 꺾어 먹는 백이ㆍ숙제의 지조가 완전치 못하다고 꾸짖고 한탄하며 단종에 대한 불멸의 충절의지를 불태웠다.
신말주도 백이ㆍ숙제나 성삼문처럼 두 임금을 섬길 수 없어 ‘수양(首陽)의 고사리’를 언급했던 것일까? 그러나 인간이 의(義)를 실천하고 지키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언제라도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생각도 말아야 할 두려운 일이다. 특히 그가 벼슬길에 서 있을 때는 혹독한 피바람이 불던, 사대부들의 기개가 송두리째 파괴됐던 야만의 시대가 아니었던가!
신숙주 아우라서 벼슬을 친히 내렸음에도 거절하는 신말주의 ‘소행’에 세조는 분노한다. 사태의 심각함을 감지한 신숙주는 “신의 아우가 병이 있어 출사를 못 하옵지, 어찌 감히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하며 땅바닥에 머리를 찧어 피가 줄줄 흐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제서야 세조가 노기를 풀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한다.
신숙주는 동생 말주에게, “만일 네가 마음을 돌리지 않으면 너뿐 아니라 집안이 편치 않을 것이다”라고 간곡히 설득했다. 신말주는 5세 때 부모를 잃고 신숙주 밑에서 성장해 그를 부모처럼 섬긴지라 일단 형의 간곡한 부탁에 따랐다. 세조 5년(1459)에 다시 벼슬길에 나가게 되고 병을 핑계로 물러나기를 반복한다. 성종 이후에는 전주부윤, 다시 대사간,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전라도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그러나 노후에도 본가가 아닌 처가에 자리를 잡고 생활한 것으로 보아 셋째 형 신숙주와의 오랜 사상적 갈등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십로계첩(十老契帖)

 

신말주는 나이 70이 되어 순창에 돌아와 생활하면서 의지와 기개가 서로 맞는 70이 넘은 노인 10명과 계회(契會)를 맺어 십노계(十老契)라 이름하고 십노계첩(十老契帖)을 지었다.
십노계첩은 연산군 5년(1499)에 신말주가 지은 계첩 서문과 그림으로 되어 있다. 계의 연유와 목적ㆍ성격ㆍ행동들을 적은 서문을 쓰고, 여기에 10인 노인들의 인물도를 그리고 경구시를 첨주한 것이다. 개개 인물을 그린 계회도라는 점에서 회화사적 가치가 있다. 1992년에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세거지(世居地)와 후손들

귀래정 아래에 있는 남산마을은 신말주와 정부인(貞夫人) 설씨(薛氏)를 비롯해 그의 후손들이 살았던 세거지(세대를 계승하면서 거주해 온 마을)이다. 세거지 좌측에는 보물로 지정된 설씨부인의 ‘권선문’과 신경준의 ‘고지도’ 등을 보관하고 있는 ‘유장각’ 등을 만날 수가 있다. 전라북도에서는 본 세거지를 지난 1994년에 기념물 제86호로 지정했다
신말주가 남산마을에 자리잡게 된 것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당시 신말주는 처고모부 권효와 함께 터를 고르는 중이었다. 그들은 남산대와 가잠마을 두 군데를 놓고 저울질했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가잠은 부(富)가 보장된 땅이요, 남산대는 귀(貴)가 보장된 땅이라는 것이었다. 권효는 가잠을 골랐고, 신말주는 남산대를 골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각각 삶의 터전을 일구었다.
이후 남산대의 신씨 문중은 순창의 명문가로 자리 잡았다. 이계(伊溪) 신공제(申公濟, 1469~1536)와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 1712~1781)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특히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백두대간’의 개념을 정리하고 우리나라 산세를 체계적으로 분류한 <산경표> 등을 저술한 조선후기의 실학자 신경준(1712~1781)은 신말주의 10대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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