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분다(7)/ 무제 2
상태바
바람이분다(7)/ 무제 2
  • 선산곡
  • 승인 2019.07.03 14: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집에서 제법 먼 거리에 우리가 자주 들르는 슈퍼마켓이 있다. 번화가에 화려하게 자리한 곳도 아니지만 대형 마트보다 야채 값이 싸고 품질도 좋은 뒷동네 가게다. 산책삼아 집을 나선 날이면 늘 가는 커피 집에 앉아 있다가 몇 블록을 건너 정해진 코스로 돌아온다. 그 길목 중간쯤에 있는 슈퍼에 들러 장을 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중 작은 물품도 친절하게 배달해주는 배려가 소비자의 삶에 여간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아파트들이 들어서기 전에는 야산 과수원으로 이름난 그곳 지형은 다른 동네에 비해 특이하다. 사는 집이야 수평이겠지만 새로 지어진 주거지역에 따라 생긴 도로는 오르막 내리막길로 이어져 걷기가 조금 힘들다. 늘 다녔던 오르막 왼편 인도는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정도다. 자동차길 쪽에 안전난간을 세운 탓에 몸집이 큰 사람들이 만나기라도 한다면 서로 몸을 틀어야한다. 인도 오른쪽엔 수삼나무가 아파트 키만큼 올라와 있고 담장엔 진짜 담쟁이덩굴이 옹벽아래서부터 뻗어 올라와 전체를 휘감고 있다. 어느 날 오르막 인도를 막 들어서려던 참이었다. 앞장 선 아내의 걸음이 멈추어졌다.
“왜?”
“이 길 걷기 싫어.”
“…….”
“이 길 오르는 것이 슬퍼.”
짐작이 아닌 공감이 내 머리를 스쳤다. 그 무렵 나도 그 길 오르는 것이 싫었다. 오르는 길은 늘 팍팍하다. 인생이 팍팍하면 몸으로 움직이는 작은 행보조차 그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왜 이 오르막길이 걷기 싫어졌을까. 지금 걷기가 팍팍해서라기보다 우리가 견디어야할 인생의 길이 힘들어서가 아니었을까. 오름의 의미는 희망을 뜻도 있지만 우리가 생각했던 그 오르막의 길은 다른 의미를 주었던 것이 분명했다. 육체보다 정신이 더 힘들다는 것을 함께 깨닫게 된 것이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몸을 돌렸다. 한 블록을 더 건너 평지로 이어진 다른 길을 걷기로 했다. 이후부터 우리는 그 오르막길을 걷지 않았다. 코스는 변경되었다. 아파트 단지 옆 논밭이 펼쳐져 있는 도시의 가장자리 길이었다. 몇 안 되는 가로수가 작은 도로에만 그늘을 드리워 더운 날엔 쨍쨍한 오후의 햇살을 그대로 받아야만 했다. 올랐다가 다시 내려 걷는 내리막길, 그리고 다시 팍팍하게 올랐다 내리는 길. 단순히 그 반복이 힘들어서가 아니었음은 분명했다.

 

장맛비가 내리다 그쳤다. 길거리 작은 화단에 접시꽃이 피어있었다. 조금 전 비바람이 줄기를 흔들어 놓았는지 정연한 자태들로 서있지 않는 게 눈에 띄었다. 꽃들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경사 진 화단 안에서 이리저리 휘어진 줄기가 울타리 벽에 기대어 서있기도 했다. 비에 젖은 꽃을 눈여겨본다. 이 색깔이름이 무엇이더라. 평생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온 색 이름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다니. 한참 만에 그 색 이름을 기억해내고 가볍게 웃었다.
잊힘이란 시간의 누적이 가져다준 결과다. 누적의 시간에서 얻은 색의 퇴화도 그 중 하나다. 색의 화려함보다 흑백이 그래서 좋아지는 것일까. 요즘 내 그림과 사진은 흑백이 대부분이다. 내가 걷는 길은 이제 색을 지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삶을 흑과 백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화려함을 뺀, 가장 순수한 대조가 흑백인 것 같다.
접시꽃이 곱다. 자줏빛이다. 장미로 치면 이 빛깔을 흑장미라고 과장할 것이다. 이 접시꽃의 근원은 어디서부터였을까. 작년, 재작년, 훨씬 그 이전부터 전해져 온 색의 인자는 앞으로도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색을 일부러 지우면서도 그 색의 아름다움에 탄성을 지르는 것이 위선은 아니다. 단지 세상이 화려한 것이 이젠 싫은 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순창 농부]순창군창업유통연구회 변수기 회장, 임하수 총무
  • 최순삼 순창여중 교장 정년퇴임
  • 선거구 획정안 확정 남원·순창·임실·장수
  • 순창시니어클럽 이호 관장 “노인 일자리 발굴 적극 노력”
  • 군 전체 초·중·고 학생 2000명대 무너졌다
  • “조합장 해임 징계 의결” 촉구, 순정축협 대의원 성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