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13) 가인 김병로, 사법부 독립 기초 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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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13) 가인 김병로, 사법부 독립 기초 다져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07.24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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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소개할 순창인물열전의 주인공은 너무도 유명한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 1887~1964)이다. 일제하에서는 항일애국지사 변론으로, 해방 공간에서는 사법 분야 건국사업을, 정부 수립 후에는 초대 대법원장을 맡아 우리나라 법률의 기틀을 잡았고 사법부 독립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

▲가인 김병로((金炳魯, 1887~1964).

 

출생과 가계

1888년 1월 27일(1887년 음력 12월 15일) 복흥면 하리에서 사간원 정언을 지낸 아버지 김상희(金相熹)와 어머니 장흥 고씨(長興 髙氏) 사이에서 3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조선시대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의 15대손이다. 부모가 서울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유년 시절은 조부모 슬하에서 유교적인 소양을 쌓으며 자랐으나 열 살도 되기 전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잃었다. 13세에 정교원의 딸 연일 정씨와 혼인했다.

청년기

17세 때 한말 거유인 간재(艮齋) 전우(田愚)에게 2년 간 성리학을 배웠고, 1904년 18세 때 담양 일신학교에서 서양인 선교사로부터 신학문을 접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해에 담양 용추사(龍湫寺)를 찾아온 최익현의 열변에 감화되어 최익현의 의병부대에 합류했고, 1906년 20세때 김동신의 의병부대에 합류해 70여명 의병과 함께 순창읍 일본인보좌청을 습격했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항일변호사로 활동하는 데 하나의 바탕이 됐을 것이다.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과 메이지대학에서 법학을 수학했다. 그해 8월 한일병합 조약 소식을 듣고 정신적 충격에 귀국했다가 1912년 다시 도일하여 메이지 대학 3학년에 편입해 이듬해 졸업했다.

항일 인권변호사 김병로

1915년 귀국해 경성법학전문학교 조교수와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 강사로 일했다. 법학자 활동을 인정받아 1919년 4월 16일 부산지법 밀양지원 판사로 임관한 그는 1년 만에 판사직을 사임하고 독립운동과 관련한 무료변론에 나선다. 그는 “일제(日帝)의 박해를 받아 비참한 질곡에 신음하는 동포들을 위해 도움을 주려고”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흔히 가인의 대표직함을 ‘초대 대법원장’으로 일컫지만 어쩌면 ‘항일변호사 김병로’가 더 적절한 것인지도 모른다. 독립운동사건 변호를 전담하다시피 했던 김병로는 이인, 허헌과 함께 일제 강점기 유명한 인권변호사 3인이다.
105인 사건을 비롯해 대동단 사건, 여운형ㆍ안창호 등이 연루된 치안유지법 위반사건, 흥사단 사건, 6ㆍ10 만세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 등 독립운동에 참가한 인사들을 변호한 사건만 100여 건이 넘는다. 각종 독립운동사건은 물론이고 전라도 바닷가 암태도에서 일어난 소작쟁의부터 개마고원 농민들의 항쟁, 백정들의 인권 투쟁에 이르기까지 김병로는 팔도가 좁다고 돌아다녔다. 1927년에는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新幹會) 중앙집행위원장이 되기도 했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조선총독부에 의해 변호사 정직 처분이 내려지고 사상 사건의 변론에서도 제한을 받게 되자, 가인은 1932년부터는 경기도 양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광복이 될 때까지 13년간 은둔 생활을 했다. 항심(恒心)의 기초는 항산(恒産)이라는 생각을 갖고 3000 평 정도의 땅을 사서 손수 농사를 짓고 양계, 양돈을 하며 자립적 경제 기반을 갖추어 광복이 될 때까지 일제의 회유와 협박을 버텨낼 수 있었다. 1940년대 일제가 창씨개명을 요구했을 때도 그는 성을 바꾸지 않았다

광복 직후와 초대 대법원장
사법부 독립과 청빈의 표본

가인은 해방 후 한민당 창당에 관여하고 한동안 몸담았지만 한국민주당의 단정(單政)노선과 토지개혁에 대한 소극적 태도에 크게 반발해 1946년 10월 탈당했다. 이후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면서 적극적으로 활동했지만 1947년 7월 여운형 암살과 10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완전 결렬로 분단과 단정 수립이 확실해진 상황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참여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그의 상징어와도 같은 ‘초대 대법원장’에 올라 재임 9년 3개월 동안 사법부 밖에서 오는 모든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권 독립의 기초를 다졌다.
취임 직후 법전편찬위원회를 발족했고, 6ㆍ25전쟁으로 혼란스러운 틈에도 민법 초안을 완성하고 1958년 민법을 제정하는 과업을 이뤄냈다.
인적ㆍ경제적 자원이 극도로 제한돼 있었고,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환경 속에서도 법치주의와 인권존중, 독립된 법관에 의한 재판을 위한 법원의 기초를 세웠다. 고령에 왼쪽 다리를 절단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거의 혼자서 법전 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다. 법정에서 검사와 변호인의 대등한 자리 배치는 물론이요, 법률용어의 한글화(특히 한글로 된 ‘증인선서’), 전세권 창안 등은 가인의 사상과 머리에서 비롯한 것들이다.
청렴강직, 지공무사(至公無私)는 그의 상표와도 같았다. 후배 법관들에게 청빈한 삶과 올곧은 정신을 입버릇처럼 강조했던 그는 “사법관으로서 청렴한 본분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될 때는 사법부를 떠나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쌍치 훈몽재부터 복흥으로 이어진 ‘선비의 길'에 있는 김병로 생가.

말년의 활동과 평가

 

대법원장 시절은 물론이고  대법원장 자리에서 물러나서도 이승만 정권에 대해 의연하고 당당하게 처신했다. 특히 국가보안법 개정 파동, 경향신문 폐간 사태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평을 내고 ‘대한민국은 누가 그 주인인가’라며 이승만 정권을 가차 없이 비판하였다.
1961년 5ㆍ16쿠데타가 발생했을 때는 동아일보에 박정희의 민정 참여를 반대하는 글을 기고했고, <사상계>에 ‘군정 연장과 국민투표에 대하여’를 기고해 군정종식을 주장했다.
1964년 1월 간장염으로 서울 인현동 자택에서 향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시대정신을 좇아 78년 생애를 숨 가쁘게 내달렸던 가인 김병로는 우리 역사에서 초대 대법원장 이상의 의미를 차지한다. ‘거리의 사람’이라는 뜻의 호에서 엿볼 수 있듯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거처할 곳이 없는 현실을 개탄한 독립 운동가였고, 건국 직후 몸소 외압을 막으며 사법부 독립의 기초를 다지며 우리나라 법률의 기틀을 잡았다. 평생을 통해 청렴 강직한 법관 윤리상을 온몸으로 실천했다. 법조계에 제2, 제3의 가인 김병로가 출현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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