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속시한줄(38)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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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속시한줄(38) 향수
  • 조경훈 시인
  • 승인 2019.07.31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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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그림 : 아원(兒園) 조경훈 시인ㆍ한국화가, 풍산 안곡 출신

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말에는 빛깔이 있고, 그림이 있고, 활짝핀 꽃이 있다. 무심히 던지는 말 한마디에 눈물이 있고 웃음이 있듯, 같은 말이지만 우리는 예쁜 말을 만나면 마음이 아름다워지고 부드러워 진다.
생각 또한 마찬가지다. 시장, 공장, 전쟁을 생각하다가 두고 온 고향을 생각하면 빙그레 미소가 생기고 멈추었던 그 일을 즐겁게 다시 시작한다.
그렇게 고향을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들 중에서 정지용의 시 향수를 만나면 고향이 참 아름답게 다가온다. 이분의 고향은 충복 옥천, 정말로 시속에 나타난 풍경이 있었을까?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얼룩배기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그래서다. 시인은 같은 말이라도 아름답고 부드러운 말만 골라서 쓴다. 그 말은 계속 이어진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다리고/…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전설 바다에 밤물결 같은/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누이와//…하늘에는 성근 별/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아름답고 서정적인 말이 전편에 가득 담겨있다. 1927년 이 시가 발표된 이후 이렇게 고향을 간절하고 정감 있게 쓴 시는 아직 만나지 못한 듯싶다.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무슨 말을 주어야 꽃이 될 수 있고, 당신이 나에게 주는 말 또한 희망 있는 반짝이는 말이 오기를 기대한다. 나와 당신이 오래동안 서로 기억 될 수 있도록…

- 정지용(鄭芝溶) 1902~1950 충북 옥천 출생. 향토적인 서정시로 출발하여 1930년대에는 모더니즘의 시를 쓰기도 했음. 시집으로는 지용시집ㆍ백록담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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