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14) 옥천부원군 조원길, 고려왕조에 충절을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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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14) 옥천부원군 조원길, 고려왕조에 충절을 지켜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08.07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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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등면 건곡리 건곡 마을에 있는 옥천 부원군 조원길 묘. 순창군청 사진. 

혼란스러웠던 14세기 후반의 고려 말.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교체되는 중원의 혼란 속에 한족의 농민반란군인 홍건적이 수도 개경까지 쳐들어오고, 큐슈의 왜구가 삼남 지방은 물론 황해도까지 침입했던 위기의 시대였다. 거기에 명나라에 밀려난 원나라에 기대는 등 시대착오적인 친원세력인 권문세족은 산천을 경계로 토지를 소유(장원, 농장)하고 왕실에 버금가는 권세와 부를 누리며 민중을 수탈했다. 이때 신진세력인 신흥사대부와 신흥무인세력이 권문세족을 타도하고 국가 경영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들 신흥사대부는 성리학적 원리에 입각한 국가 운영을 주장하며 개혁을 주도해나가는데 그 주역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순창 출신인 옥천부원군 조원길이다.

 

조원길의 가계

고려 말 충신인 조원길은 본관이 옥천이고, 자는 성중(聖中)이며 호는 농은(農隱)이다. 옥천조씨의 시조인 장(璋)의 증손으로 부원군 전(佺)의 아들이다. 옥천은 순창의 옛 지명이다.
조원길은 충목왕 2년(1345)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공민왕 18년(1369)에 문과에 급제했다.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타고난 성품이 충량했으며 문예와 학명이 일찍 알려졌다. 국정에 참여해 굳세고 과감하게 대의를 주장했다. 어려운 일을 당해도 구차함이 없었으므로 당시에 임금을 보좌할 자품이 있다고 칭송 받았다. 고려말 신진사대부들의 사부라 할 수 있는 목은 이색, 그 제자 포은 정몽주와 설장수 등 여러 선비들과 명성을 같이 했다. 그의 도덕과 훈업은 《고려사》와 《동국명신록》 등에 기재되어 있다.

국정 개혁을 위한 충언

원나라와 명나라의 교체시기에 조정의 의논이 둘로 나뉘자, 농은 조원길은 “군신 사이의 큰 의리와 천리, 인륜은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대의를 세워 지금까지 오랑캐에게 물든 것을 소제하고 해와 달의 광명을 보아야지 저 이인임 등이 오랑캐로 변하여 대의를 저버린 것을 말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며 이색, 정몽주 등과 함께 원 나라를 배척하고 친명정책을 추진할 것을 주장했다.
우왕 1년(1374)에는 “음사(淫祀, 부정한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말하며, 여기서는 불교를 의미함)는 아무런 복도 주지 않으니 탑묘를 헐고 학궁 세우기를 청합니다. 또 “학전(學田=섬학전, 고려ㆍ조선시대에 교육기관의 경비에 충당하도록 지급한 토지)을 설치해 인재를 양성할 것”을 상소했다.
또 이르기를 “백성들이 가까이서 임금의 덕을 펴는 자는 수령입니다. 지금은 탐욕스러움이 풍속을 이루어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백관 가운데서 청렴 공평한 사람을 가려 어사로 삼아 어두운 자는 내쫓고 밝은 자는 높여야 합니다. 또 풍년에는 흉년을 대비하여 곡식을 저축하며 군사를 양성해 외침에 대비해야 합니다” 하는 등 국정 개혁과 민생 안정을 위한 충언을 거듭했다.

공양왕 옹립에 기여하다

조원길은 나라의 형편이 날로 어려워지는 것을 보고 벼슬에 뜻을 잃어 우왕 15년(1388) 가족을 이끌고 개경에서 고향인 순창군 유등면 금굴리(金掘里)로 물러났다.
그러나 1389년 다시 상경하여 정몽주ㆍ설장수ㆍ성석린 등과 함께 의논해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데 공을 세워 일등 공신에 서훈되어 대광보국 광록대부(大匡輔國光祿大夫)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겸(兼) 전공판서(典工判書)로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해졌다.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의 길을 걷다

이때 이성계의 위엄과 덕망이 날로 높아져 백성들의 마음을 크게 샀다. 여기에 이성계와 정도전, 남은 등이 새 왕조 건국에 뜻을 모았다 생각하고 조원길은 호연하게 물러나 순창으로 돌아왔다. 금굴리에 기거하며 문을 닫고 절개를 지키며 백이숙제전을 외우고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읊었는데, 그 비분강개함이 마치 죽으려는 것 같았다고 한다.
개경을 떠날 때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가 시를 지어 조원길을 송별했다. 조원길이 이색에게 준 시에 “귀먹은 듯 인간사를 듣지 않으니 달 밝은 시냇가에 도롱이 걸친 한 농부더라” 하니 이색이 이를 보고 조원길에게 다음과 같이 시를 써 보냈다.(월정 윤근수의《월정집》에 전하고 있다.)

연복사 종소리 아직 울리지 않았는데 / 이불 끌어안고 앉아 추운 밤을 보내네 // 이 몸은 늙어 병들고 천지도 늙어 가는데/ 삼라만상은 일월처럼 밝기만 하네 // 저구는 기꺼이 조나라 보존할 마음 두고/ 화봉의 백성은 공연히 요임금 축수하네 // 유유한 고금의 무궁한 일들이/ 수심을 자아내어 마음이 편치 못하구나 // 귀 어두운 듯 세상 일 듣지 않고/ 달 밝은 시냇가에 도롱이 걸친 사람이었네

사망과 묘ㆍ묘표, 신도비(神道碑)

조원길은 낙향한 다음 해인 공양왕 2년(1390년 8월)에 사망했다. 낙향하여 지내면서 후손들에게 전한 말이 ‘생사진퇴(生死進退) 무괴의자(無愧義字)’다. ‘죽고 살고 나가고 물러남에 의(義)라는 글자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라’ 라고 한 것이다. 이는 자식들에게 들려준 가훈이었지만 하나의 종훈(宗訓)으로 이어져 옥천조씨들의 가슴에 면면히 700년 동안 이어져 오고 있다.
조원길이 사망하자 나라에서 예장(禮葬)을 명하고 다음 해 일월에 유등면 건곡촌 자좌 언덕에 장사하니 충헌(忠獻)이란 시호를 내렸다. 정조13년(1788) 사림의 상소에 의해 순창 무이서원(武夷書院)에 배향되었다.
조선개국 후 사람들은 고려왕조에 끝까지 충절을 지킨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등 삼은(三隱)과 도은 이숭인, 농은 조원길을 합하여 오은(五隱)이라 칭하였다.
옥천 부원군 조원길 묘 및 묘표는 유등면 건곡리 건곡 마을에 옥천 조씨 시조의 설단(設壇)과 함께 있다. 묘소는 조원길과 옥천 군부인 조씨를 함께 장사한 봉토분으로, 묘역의 형태와 배치는 고려 시대의 능묘와 유사하다. 풍수학에서는 게형(蟹形) 명당이라고 불리고 있다.
현재까지 전라북도에서 발견된 고려비는 금산사의 혜덕왕사비 뿐이므로 조원길의 묘표는 고려시대 비문의 형태와 서체 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학술적 ㆍ역사적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1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원길 신도비(趙元吉神道碑)는 1908년 5월 조원길의 묘소 아래쪽 옥천 조씨(玉川趙氏)의 재실 옆에 세웠다. 방형좌대 위에 비신을 세우고 개석을 올려 웅장하게 보인다. 비문은 면암 최익현이 짓고 두전은 송병순이, 글씨는 이재윤이 썼다.
최익현은 신도비에서 “공의 사소한 행실은 비록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높은 절행과 대의는 거의 포은ㆍ목은ㆍ야은과 같다는 것을 이미 선배들이 논정했으니 고기 한 점만 맛보고도 한 솥의 맛을 다 알 수 있는데 어찌 하필 많아야만 하겠는가”며 “사업을 발휘하여 왕실을 돕고 만절에 물러나서 의리로 절개 지켰네. 여기에 비석 세우니 지나는 사람 절하리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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