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삼복과 백중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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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삼복과 백중날
  • 김효진 이장
  • 승인 2019.08.13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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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풍산 두지마을 이장

말복을 맞아 복달음 식사를 안내하는 마을방송을 했다. 식당에 인원수도 미리 알려줘야 할 터라 주민들을 일일이 만나 식사하러 가자며 재촉한다. 걷는 게 불편해 다른 사람들에게 폐 끼치는 건 아닌지 눈치 보던 아짐은 짧은 망설임 끝에 가기로 했다. 하지만, 가벼운 치매기운으로 집에서 칩거하다시피 하는 응달에 사는 할머니는 바람 쐬러 나가자는 설득에도 끝내 고사하며 마루 아래로 나서질 못한다. 몸에 불편함이 없는 아짐들 중에서는 바깥양반 가는데 나까지 갈수 있냐며 사양하다 가벼운 설전을 벌이기도 한다. 식당에서 보낸 버스가 왔다. 주민들 대다수가 차에 올라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복날과 백중날이면 큰 솥 걸어놓고 닭도 삶고, 개도 삶아서 음식을 나누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단한 남의집살이 하는 머슴들은 대접받는 날이기도 했다. 집안 벌초 때마다 만나는 사촌형님은 젊을 적 상머슴 할 때 백중날이면 이틀 휴가를 받아 특별 세경으로 쌀 한 말을 어깨에 메고 집에 왔다는 말씀을 자주 하곤 했다.
24절기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백중날은 삼복더위를 지나며 고된 농사일에 지친 농민들에겐 한시름 놓는 시기다. 논과 밭 세벌 김매기를 마치면 농사의 큰 고비는 넘긴 셈이기 때문이다.
각 농가에서 제각기 음식을 내어서 시냇가나 또는 산기슭의 나무 그늘 밑에 모여 앉아 술과 음식을 같이하면서 질탕하면서도 질펀하게 하루를 즐긴다. 나에겐 어릴 적에 동네 사람들이 전을 부쳐 집집마다 돌려먹은 기억이 있다. 열 살 남짓한 아이들은 또래를 지어 냄비와 라면만 챙겨 마을 뒷산 정상에 올라 그 시절 귀했던 라면을 끓여먹는 호사를 누리는 날이기도 했다. 운 좋은 해엔 임실 성수와 진안 백운 너머에 있는 마이산을 볼 수 있는 특별한 날이었다. 그만큼 복날이나 백중날은 농사짓는 농촌에서는 안식일이자 명절이었다.
이젠 복날이나 백중날이 와도 가까운 사람 몇이서, 혹은 특별히 마을 주민들과 함께 식당에 음식을 주문해놓고 한 끼니 함께 하는 것으로 대체하고 만다. 마을에서 음식 장만할 사람도 없거니와 마을 주민이 함께 어울릴만한 마음의 여유와 정성을 내놓지 못한다. 직장이랄 수 있는 농사일이 과거에는 공동작업장이었다면, 지금은 개인자영업 하듯 노동하다 보니 놀이와 문화 역시도 개별화되어, ‘더불어 공동체’는 갈수록 자취를 감춘 채 사라진 듯하다.
오리 주물럭과 백숙으로 식사를 마치고 마을에 돌아왔다. 불편한 어른들 버스 하차를 돕는 내게 하는 인사로, 잘 먹었다, 나까지 챙겨줘 고맙다, 그러신다. 이장이 밥값 내는 것도 아니고 동네 돈으로 식사 한 끼 하는데 왜 제게 공치사를 하시냐며 민망한 상황을 모면하지만, 그 분들에겐 여전히 밥 잘 얻어먹은 식사 대접일 뿐이다.
동네에서 준비하는 밥 한 끼에도 많은 사연과 아픔이 있음을 안다. 과거처럼 배곯던 시절엔 남의 잔칫집에 여러 ‘갠숙’ 데려가는 것이 흉이었듯이, 마을 식사 한 끼 자리에도 “어머니가 가시라”, “며느리가 가라”하며 가족 당 숫자 줄이느라 마음을 다 쓴다. 평생 모진 농사일과 가사에 등골 휘고 무릎병 도져 보행기에 걸음을 의지하는 우리의 어머니들은 늘그막에까지 여전히 눈치를 보며 살고 있다.
몇 차례 태풍이 다행스레 비켜간 논에는 벼 줄기가 제법 통통해졌다. 씨 나락이 씨눈을 터뜨린 지 석 달 하고도 보름이 지나 곧 벼 이삭이 올라올 것이다. 한 치라도 더 길게 나락 모가지가 올라오길 고대하는 만큼, 올 가을 쌀금도 좀 올랐으면 하는 농민의 부질없는 기대와 기다림도 학 모가지만큼이나 길게 나올 것이다.
막바지 무더운 여름, 왁자지껄함이 사라진 농촌의 삼복과 백중날은, 이제 쓸쓸한 계절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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