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15) 의병전쟁에 청춘 바친 최산흥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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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15) 의병전쟁에 청춘 바친 최산흥 의병장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08.21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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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국권회복에 앞장섰던 의병부대. 독립기념관 소장. 의병 최산흥의 사진은 찾을 수 없었다.

일본의 국권 침탈에 반대한 구한말의 항일 의병전쟁은 을미ㆍ을사ㆍ정미의병으로 이어졌고, 국권피탈(1910년 8월 29일) 이후에는 항일무장독립운동 세력의 근간이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진압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호남 지역 농민군이 살해되어, 1895년의 을미의병 시기에는 호남 의병 투쟁이 크게 일어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을사ㆍ정미의병의 경우에는 달랐다. 을사의병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정읍과 순창을 무대로 활약한 최익현과 임병찬의 활동이 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는 도화선이 되었다. 최익현과 임병찬의 피체 이후에도 순창, 호남에서 수많은 의병장이 나타났다.

 

을사늑약에 분개해 의병전쟁 참여

최산흥(崔山興, 1881~1910)은 원래 구림면 율북리 통안마을에 살았다. 잡화상을 하며 평범한 백성으로 살고 있던 최산흥은 1905년 일본의 강요로 외교권이 박탈당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격분해 의병에 투신하게 된다. 1906년 10월부터 1909년 12월까지 의병장 이경춘(李慶春), 이석용(李錫庸), 양춘영(楊春永, 윤숙) 부대를 거치며 주요 구성원으로 활동했다. 최산흥은 일본군과의 전투뿐만 아니라 일본에 협력하던 친일부역자들의 가옥을 방화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는 업무도 담당했다.
최산흥은 23세의 나이에 이경춘 의병장의 휘하에 들어가 1906년 10월부터 12월까지 활동했다. 이경춘 의병부대에서 도십장(都什長) 및 전포장(前砲將)을 맡아 활동했다. 이경춘 의병부대는 120여 명이 총 90자루를 휴대하고 전라북도 태인과 부안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싸웠다.
최산흥은 1907년 7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이석용(1878-1914. 임실군 성수면 출신) 의병부대에서  검찰(檢察)이라는 직무를 맡아 총기 100여 정을 휴대한 의병 120여명을 이끌고 임실ㆍ남원ㆍ진안ㆍ용담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08년 1월 9일 밤에는 부하 10명과 함께 임실군 강진면 갈담리에 가서 김대춘, 김봉근 등 부하 10여 명에게 명령해 변대규(邊大主)를 납치해 같은 마을 최덕림의 집으로 끌고 갔다. 변대규는 일본 기병대에게 집을 빌려주는 등 일본군에게 편의를 제공한 친일부역자였다. 변대규에게 군자금을 내라고 했는데 불응하므로 화포실로 보내겠다고 협박한 후, 다른 여러 명과 함께 총을 휴대하고 다시 변대규의 집으로 끌고 가서 엽전 100냥과 백목 3필을 몰수해 군자금으로 사용했다.
그해 3, 4월에는 이석용 의병장과 100여 명 동지와 함께 무기 100여 정으로 무장하고 임실군 상동으로 출동해 임실읍 수비 기병대와 순사 주재소를 습격했다. 기병 1명을 사살하고 2명을 부상케 하는 전과를 올렸다.

양춘영 의병부대에서의 활약

최산홍은 회문산 호랑이로 명성을 떨쳤던 양춘영이 의병을 일으킬 때 처음부터 동참했다. 양춘영이 1908년 구림면 국화촌의 뒷산인 회문산에서 ‘의격문(義檄文)’을 지어 각지에 보내고  의병을 봉기할 때 최산흥은 양춘영과 함께 이름을 실었다.

<의격문(義檄文)>
‘난신들의 발호로 오백년 사직이 무너지고 삼천리 강토가 금수의 나라로 변했다. 개화장정(開化章程)은 선왕의 법도가 아니니 척화(斥和)의 대의 열사의 절의로 국민을 위해 목숨을 바칠 때가 왔다. 비록 무기는 날카롭지 않으나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본의 충신이 된 대한의 난적들을 처단하고 말 것이다.’의소대장(義所大將) 양인영(楊寅泳, 양춘영의 가명) 중군(中軍) 최산흥(崔山興)

최산흥은 1908년 6월부터 1909년 10월까지 양춘영 의병장 아래에서 중군장이 되어 순창과 임실을 무대로 활동했다. 1909년 10월까지 부하 5∼600 명과 함께 총기 200정을 휴대하고 대활약을 펼친다. 최산흥이 양춘영 의병부대에서의 주요 활동내용은 다음과 같다. 1908년 음력 8월 무림면(현 구림면) 화암리에서 일본군 순창수비대 및 헌병대와 교전, 9월 구림면 국화촌에서 남원수비대 기습 공격, 11월 일본군 기병대가 사용하는 임실군 강진면 갈담리 소재 민가를 습격해 소각, 1909년 정월 서면 죽전리 순창수비대 10여 명에 대한 공격, 2월 회문산 기슭 산내리에서 순창수비대 10여 명 공격 등이다.
최산흥은 빼어난 활약을 보였는데, 1908년 9월, 40여 명을 인솔하고 구림면 화암리 앞산 국화촌에서 남원수비대를 기습한 것이 대표적이다. 양춘영 의병부대에서 최산흥의 직계 부하들은 대체로 순창과 임실 출신이었다. 조복동(趙福同)ㆍ김기룡(金基龍)ㆍ배팔봉(裵八奉)ㆍ박선경(朴善敬)ㆍ임유등(林柳等)ㆍ박가우(朴可又)ㆍ옹태룡(邕太龍)ㆍ엄일봉(嚴一奉)ㆍ조화중(趙化仲) 등이다.

남다른 군자금 모금활동

최산흥은 부하들과 함께 친일파의 가옥 방화, 군자금 모금 등을 계속했는데 각 이장에게 할당해 징발했다. 1908년 11월 초순 양윤숙 의병장의 지시로 검찰 직무를 맡은 최명칠(崔明七)에게 명해 의병 3-4명을 이끌고 순창군 서기 조명운(曺明云)에게 군자금 제공을 종용했다. 최산흥은 12월 3일과 8일 총을 휴대한 부하 3~4명과 함께 구암면(현 구림면) 치천촌에서 두 차례에 걸쳐 돈 500냥을 받아냈다.
그의 부하들의 재판기록에 의하면 기타 군자금 모금 활동은 다음과 같다. 1909년 음력 2월 10일 양춘범(구림면 구산리 출신) 등 10명과 함께 금과면 고례리 정규봉의 집에서 엽전 40냥, 3월 18일 양경학(구림면 구암리 출신) 등과 함께 장암리 이장 오도진의 집에서 엽전 10냥, 5월 7일 박선경(순창읍 백야 출신) 등 6, 7명과 함께 임실군 운암면 가곡리 홍 진사의 집에서 엽전 100냥, 10월 15일 배팔봉(적성면 원촌 출신) 등 10여 명과 함께 구림면 문치리 강대중의 집에서 엽전 30냥을 제공 받았다.

20대 청춘 나라 위해 바친 열사

1909년 12월 15일에는 다시 양춘영의 명을 받고 임실군 강진면 갈담리에 사는 친일부역자 변대규의 집에 부하 60여 명을 인솔하고 찾아갔다.(이석용 휘하에서 활동하던 1908년 1월 9일에도 변대규에게서  엽전 100냥과 백목 3필을 몰수해 군자금으로 사용한 적이 있다.) 그러나 변대규의 집을 소각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그만 일본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1909년 12월 27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언도받고 항고했으나 1910년 3월 3일 대구공소원과 4월 8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형이 집행됨으로써 순국했다. 그때 나이 28세였다.
당시 왜적과의 투쟁에 나선 항일의병의 이름으로 최산행(崔山行), 최산형(崔産形), 최산응(崔産應) 등이 보이는데 《전북의병사》에 보면 이들은 모두 최산흥과 같은 사람임을 밝히고 있다.
최산흥은 의병전쟁에 투신했던 1906년 10월부터 일본군에게 체포된 1909년 12월까지 의병장 이경춘, 이석용, 양춘영 부대의 주요 구성원으로 크게 활약했다. 23세 때부터 28세 때까지 청년기를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다 순국했다. 승패가 처음부터 불 보듯 뻔했으나 맨주먹으로 일으킨 구국 항일의병전쟁에서 최산흥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당했다. 일제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으면서도 털끝만치도 굴복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안타깝게도 재판기록에 나타난 의병활동 외에는 가족이나 친척, 그리고 그의 성장기나 생활 등 구체적인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이 거의 없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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