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목숨 걸고 찾아 헤맨 어머니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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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목숨 걸고 찾아 헤맨 어머니 추억
  • 설균태 향우
  • 승인 2019.08.28 14: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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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신곡(信谷) 설균태 수필가
 민주평통 중앙상임위원)

전쟁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길 갈망하며

때는 1951년, 민족상잔의 한국전쟁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다. 내 나이 열세 살 때의 일이다. 당시 낮에는 아군인 국군이 통치했지만 밤에는 주로 산에서 활동하던 공산게릴라인 빨치산이 민가로 내려와서 먹을 식량과 옷가지들을 약탈해가곤 하던 시절이다. 특히 내가 살던 순창 풍산면 함촌부락은 마차길도 없는 두메산골로, 지리산을 주 무대로 하는 남부군(별칭 빨치산)의 활동이 왕성한 지역이었다. 쉽게 말하면 낮에는 국군이 통치하고 밤에는 빨치산이 통치하던 하루하루가 불안하기 짝이 없는 엄중한 시기였다. 내가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들 남매하고 보잘것없는 농사를 지으며 세 식구가 근근이 연명하는 처지였다.
그날은 옥과 장날이었다. 어머니가 다니는 5일장은 순창장과 옥과장이었는데 어머니는 옥과장을 더 자주 다니는 편이었다. 그때는 차가 없어서 걸어가야 하는데 옥과장(6km)이 순창장(8km)보다 더 가까운 탓이었다. 그런데 옥과장은 해발 300m 정도 되는 설산의 송림재를 넘어야 하는 험준한 산길이라 해가 지고나면 인적이 끊기는 곳이었다. 어머니는 장날이면 집에서 가꾼 푸성귀(야채)를 뜯어서 장에서 팔아 몇 푼 안 되는 돈이라도 마련하여 필요한 생필품을 사오곤 하였다. 그때가 9월 초순 쯤 되어 밤에는 제법 쌀쌀한 날씨였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올 시간이 넘어, 이미 땅거미가 져서 어둑어둑한데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한창 전쟁 중이니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아버지도 안 계신 우리 3남매에게는 어머니마저 무슨 일이 생기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었다. 어머니를 찾아서 집을 나서려는데 어린 동생들이 “오빠! 형! 어두운데 큰일 난다”고 울부짖으며 막아섰다. 그러나 어머니 걱정 때문에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울고 있는 동생들을 뿌리치고 벌써 어두워진 산길을 희미한 달빛으로 가늠하며 걸어갔다.
잘못하면 빨치산에게 걸려 죽을 수도 있지만, 두려움도 잊은 채 오직 머릿속에는 어머니 생각뿐이었다. 그 당시 밤중에 산속에서 사람이 나타나면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르기 때문에 무조건 총부터 쏴댔다. 어두워진 산길을 걸으면서 풀숲에서 산토끼라도 나타나면 몸이 오싹하고 머리카락이 쭈뼛쭈뼛하며 놀랐지만, 오직 어머니 생각 때문에 공포심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다행히 옥과장까지는 무사히 도착했으나 어머니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장바구니를 낀 어머니 모습을 얘기하며 물었으나 못 봤다는 대답뿐이었다. 아무리 이리저리 둘러보고 찾아봐도 어머니는 찾을 길이 없었다. 어머니는 찾을 길이 없고 동생들 걱정이 태산 같았다. 여덟 살, 네 살 된 동생들은 어머니도 없고 내 연락도 없으니 얼마나 걱정을 하고 있을까 생각하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집 있는 쪽으로 조금 걸었는데 국군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통행을 막고 있었다.
지키고 있는 국군에게 딱한 사정을 얘기 했지만 절대 못 간다고 붙잡으면서 가다가 죽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군인들 초소로 데려가 시장 할 테니 먹으라며 자기들 먹는 주먹밥을 주었다. 배는 고프지만 나는 밥은 먹지 않고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응해주지 않아서 그러면 집에 있는 동생들에게 내가 무사하다고 연락이나 취해달라고 부탁하니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남원을 거쳐 순창읍을 경유해 초소간 연락병을 통해서 동생들에게 연락할 테니 안심하고 내일 가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야 어머니 걱정이 더욱 간절했지만, 배가 고프니 군인이 준 주먹밥을 먹었다. 다음날 알게 됐지만 군인들이 내 동생들에게 연락한다고 한 말은 나를 안심시키려고 한 거짓말이었다. 사실 그때는 그렇게 연락할 수 있는 체계가 갖추어 있지도 않았다. 국군 막사에서 잠자리에 들었지만 행방불명인 어머니와 집에 두고 온 동생들 걱정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거의 뜬눈으로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새웠다. 다음날 아침 허락을 받아 다시 험한 산길을 넘어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어머니가 어떻게 됐을까 불안한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집에 와보니 어머니가 와 계시는 게 아닌 가.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어머니와 나는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자초지정을 들어보니, 전날 어머니는 시장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산 밑 가덕부락에 사는 친구를 만났는데, 저녁 식사를 하고 가라고 붙잡아서 잠시 친구 집에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해가 저물고 어두워져서야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나와 어머니는 길이 엇갈린 것이다. 어머니는 집에 와서 사정얘기를 듣고 한식경이 지나도 내가 돌아오지 않자 늦은 시각에 산을 넘다가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나하여 혼비백산이 되어 마을사람들에게 알렸다. 어머니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횃불을 들고 산 밑에까지 가서 내 이름을 부르면서 찾아 나섰으나 나를 만날 수 없어 더 이상 산을 넘어가서 나를 찾을 수는 없었다. 산속에 빨치산들이 진을 치고 있던 전쟁 중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큰아들이 산속에서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나 하는 불길한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나는 어머니와 서로 의존하고 살아가던 소년가장이었다. 이 일은 한국전쟁 중에 경험한 잊을 수 없는 애처로운 추억이다. 지금은 그날 밤 일을 한낱 지나간 일로 회고 하고 있지만, 그 날 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이승에서 이 글도 남길 수 없고 마음 아픈 전설로만 남겨졌을 것이다. 다시는 이 땅에서 6ㆍ25 전쟁과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갈망할 뿐이다.
어머니는 30대의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어 두메산골에서 농토도 별로 없이 근근이 연명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시골형편으로는 도저히 자식을 중학교도 보낼 수 없었기에, 어떻게든 가르치겠다는 일념으로 서울로 올라와 길거리 노점상 등을 하면서 온갖 고초를 겪었다. 어머니는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고 우리 3남매를 의젓하게 길러내셨다. 지금은 먼 하늘나라에 계시지만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불쌍한 사람에게 더운 밥 한 그릇 대접하시던 따뜻한 어머니의 정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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