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분다(11)/ 단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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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분다(11)/ 단상 2
  • 선산곡
  • 승인 2019.09.0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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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몇 개월 째 드나드는 어느 건물, 주차장에서 오르는 나무계단 주변에 몇 그루 백일홍 꽃이 흐드러졌다. 여름부터 백일동안 피는 붉은 꽃이라는 뜻에서 백일홍, 배롱이라고도 부르는 부처꽃과의 나무다. 간지럼을 탄다고 하여 고향에서는 ‘간지랍밥나무’라고 불렀다. 주름진 작은 꽃잎들이 지고 피기를 거듭하여 석 달. 대부분 붉은 색이지만 보라색 꽃(紫薇花)도 있고 더러 흰색 꽃도 있다. 백일홍의 흰 꽃이 돌연변이는 아니겠지만 희건 붉건 백일홍은 백일홍이다. 백일홍 꽃이 지면 햅쌀밥을 먹는다는데 절기의 흐름은 엊그제 겨우 8월을 보낸 정도다. 백일홍 저 꽃은 언제 지나.
아직 백일홍 꽃은 흐드러져 곱다. 햅쌀밥 먹고 싶어 꽃 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닌데 문득 이는 한숨에 오늘 하루가 길 뿐이다. 할 수만 있다면 느리게 흐르는 고통의 강을 압축시켜 뚝딱 건넜으면 좋겠지만 저 꽃처럼 치장되어 머물러 서 있어야하는 게 현실이다. 그 강가에 닿기 위해선 아직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저 꽃은 지겠지. 꽃 지고나면 가지에 바람이 놀러와 간지럼도 태울 것이다.

 

손이 가렵다. 오른 손 새끼손가락 부근에 빨간 열점이 새 개다. 모기에 물렸는지 아니면 쐐기에 쏘였는지 그 주위의 가려움이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비조차 오는 대낮에 텃밭에 풋고추 몇 개 따온 뒤에 생긴 일이었다.
50여 년 전에 본 만화가 생각난다. 모 신문에 연재된 <블론디>라는 4컷 만화. 손바닥이 가렵다는 아내 블론디에게 남편 대그우드가 돈 생길 징조라고 말한다. 아내는 거침없이 그 징조를 내세워 남편에게 돈을 뜯는다. 아내는 돈 생길 징조였지만 남편에게는 돈 뜯길 징조였던 셈이다. 그 블론디처럼 손바닥이 가려우니 돈이 생길 징조는 없는가. 복권이나 사서 당첨된다면 모를까, 아무리 뒤집어 봐도 돈 생길 일은 없다. 그런데 요즘 복권은 당첨이 되더라도 인생을 바꾸는 정도도 아니란다. 운 좋게 당첨되더라도 쓸 만한 빌딩하나도 못 산단다. 그러니 욕심 부리지 말고 분수에 맞게 사는 게 옳다. 그러나 엄밀히 그 말은 그냥 허세다. 빌딩은 못 사더라도 복권에 당첨되는 것을 마다할 사람은 없다.
<블론디>를 처음 그린 칙 영이 세상을 떠난 뒤 아들 딘 영이 똑같이 <블론디>를 그리고 있다고 한다. 딘의 아들도 그 뒤를 이어 <블론디>를 그릴 예정이라고 하니 작가도 독자도 대를 잇는 작품이 된 모양이다. 가려움의 대가를 허세삼아 해보는 푸념이지만 70년 가까이 늙지 않는 <블론디>는 지금도 가끔 손바닥이 가려운지 모르겠다.

한 남자가 시선을 끌며 들어왔다. 나이 50이 가까워 보이는 스포츠머리를 한 그가 먼저 온 자기 일행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여름 햇볕에 얼마나 그을렸는지 드러난 피부가 짙은 갈색에 가까워져 있었다. 흰 와이셔츠자락을 흰 바지에 넣어 입고 검은 색 벨트를 맸다. 한 쪽 귀에는 순금귀고리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이에 비해 상상을 초월한 패션이었다.
“흰 옷 멋지게 입었다잉.”
그가 앉자마자 그 앞에 앉아있던 친구가 하는 말이었다.
“타서 검은 얼굴 밝게 보이려구 입었다.”
자리에 앉던 그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건넌 자리에 앉아있던 내게도 그들의 대화가 뚜렷이 들려왔다. 야심 찬 그의 패션을 폄하할 생각은 없었지만 명도대비 공부는 안 한 모양이었다. 요즈음 남자가 귀고리 차는 게 흔한 일이 돼버렸다지만 그 남자 나이에 귀고리는 바라보기가 조금 민망했다. 더구나 귀고리 차는 방향이 왼쪽이냐 오른 쪽이냐에 따라 어떤 성향의 표출임을 아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무언가가 불편하여 그들이 보이지 않도록 나는 자리를 바꿔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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