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16) 노일환 제헌국회의원…반민특위 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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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16) 노일환 제헌국회의원…반민특위 기수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09.04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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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일환(盧鎰煥, 1914~1982)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쌍치면 운암리에서 태어났다. 배재고등보통학교를 거쳐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상과를 졸업했다. 1936년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입사, 1941년 8월 폐간될 때까지 정치경제부 기자로 활동했다. 1946년 1월 동아일보가 복간된 뒤 재입사하여 정치부장과 사회부장을 지냈고, 조선신문기자협회 조사부장 등을 역임했다. 언론인으로서 식민지 시절부터 해방 공간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체험한 조국의 비참한 현실은 훗날 그가 조국의 모순을 해결하는데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 제시해준 밑거름이 되었다.

 

▲제헌의회 당선 직후 노일환 의원. 유족 노시선 제공

제헌국회 소장파 리더

 

일제 압제에서 벗어난 해방의 기쁨도 잠시, 미국과 소련 두 외세에 의해 한반도는 두 동강 났다. 그 결과 1948년 5월 10일 남한 지역에서만 첫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 노일환은 한국민주당(한민당) 소속으로 순창에서 당선되었다. 만 34세였다.
제헌국회는 7월 12일 헌법을 제정하고 20일에는 이승만과 이시영을 제1공화국의 정ㆍ부통령으로 선출했다. 정부조직법을 비롯하여 양곡매입법, 지방행정조직법 등 법률 20여건을 제정하며 대한민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제헌국회에서는 진보적인 소장파 의원들이 눈부신 활동을 펼쳤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노일환이었다. 노일환이 소속된 한민당은 호남 지주 김성수가 이끄는 지주들과 친일파로 구성된 보수정당이었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지향은 한민당과는 전혀 달랐다. 노일환은  소장파 그룹 동성회(同成會) 소속으로 있으면서 혁신파 국회의원의 리더로 활약했다.

반민특위 ‘기수’
 
노일환은 제일 먼저 친일파 척결을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과 농지개혁법 제정에 앞장섰다. 나라가 제대로 서려면 식민잔재 청산과 경제개혁이 무엇보다 시급했기 때문이다. 특히 해방 후 한국의 과제는 일차적으로 자주적인 통일 정부 수립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제강점기에 반민족행위를 저지른 친일파의 청산이 중요했다.
제헌국회는 친일파를 처벌할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조항을 제헌 헌법에 두고,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했다. 그해 10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설치되었고 노일환은 특별검찰부의 차장을 맡았다. 반민특위는 국민의 높은 관심과 지지 속에서 1949년 1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외국군 철수 주장ㆍ국가보안법 제정 반대

노일환은 소장파 의원들과 함께 외국군의 완전 철수, 남북정당ㆍ사회단체 대표로 구성된 남북정치회의 개최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평화통일방안 7원칙’을 제시했다. 노일환은 해방된 조국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평화적 통일과 민족의 자주성을 확보하는 것이고, 우리의 자주독립이야말로 외국군의 철퇴로부터 올 수 있고 이 외국군의 철퇴만이 남북통일이 평화적으로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8년 10월 이승만 정부에 반대하는 여순항쟁이 터지자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려고 했다. 노일환은 이것이 정적을 탄압하는 데 이용될 수 있고 일본 강점기의 치안유지법과 다를 것이 없다며 반대했다. 이후 50년 동안 국가보안법은 헌법보다도 상위에 있는 무소불위의 법으로 기능했는데, 노일환은 마치 앞을 내다본 것처럼 이 법이 악용될 것임을 예견했다.

국회 프락치 사건

1949년 5월 20일, ‘프락치’라는 러시아어 단어는 당시 2000만 한국인에게 친숙한 단어로 부상한다. 악명 높은 공안검사 오제도를 위시한 검찰이 남로당 지령을 받아 외국군 철수 촉구 건의안과 남북통일협상안을 제출한 혐의로 국회의원 6명을 구속했고, 이후 혐의자들은 13명으로 불어난다. 노일환을 비롯해 김약수 국회부의장, 이문원 등 소장파 의원 13명을 국가보안법 혐의로 체포한,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이다.
고문으로 인한 구속 의원들의 자백 외에 이 사건의 유일한 증거(?)는 이른바 여성 특수공작원이라는 정재한에게서 나온다. 검찰은 국회 프락치 의원들을 배후 조종한 남로당원의 애인이었다는 이 여자가 암호문을 음부 속에 넣고 월북하다가 체포됐다고 발표했다. 검찰은 정재한이 그 음부에 “3월분 국회 공작보고서, 유엔 한위에 진언서를 제출하는 투쟁보고서를 비롯해 ‘암호해표’ 등 40∼50쪽에 달하는 장문의 문건을 감추고 다녔다”는 황당한 근거를 들이댔다.
국회 프락치 사건 공판에서 검찰은 정재한의 문건 외에는 분명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고, 결정적인 증인이라는 정재한은 재판에 출석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재판이 한창 진행되던 그해 겨울에 갑자기 정 여인의 사형을 집행하였고,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된 소장파 의원들은 모두 실형을 선고받았다.
현대사를 전공한 대부분 역사학자는 노일환 등이 주장한 친일파 척결이 이승만과 한민당의 기반을 뿌리째 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공포가 퍼진 것이 국회 프락치 사건이 터진 중요한 요인이었으며,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조작된 사건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반민특위에 체포된 친일 매국노.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좌절된 친일청산의 꿈

 

국회 프락치 사건 재판이 진행되던 즈음, 친일 경찰들이 주도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는 6ㆍ6 사건이 일어났고 백범 김구가 안두희의 총에 암살된다. 이승만은 자신의 정적을 하나하나 제거해 가며 권좌를 굳혀 갔다. 이승만과 친일세력의 방해로 반민특위 활동은 급격히 위축되었고 1949년 10월 4일 완전히 해체되었다.
짧았지만 왕성했던 노일환의 활동은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1949년 2월 서울지방법원은 노일환에게 징역 10년, 다른 의원들에게도 2∼12년 형을 선고했다. 실형을 받은 의원들이 항소심을 기다리던 중 한국전쟁이 터졌고, 서용길 의원을 제외하고 노일환 등 10여명의 의원들은 전쟁 와중에 월북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월북한 것이 프락치였다는 증거가 아니냐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신을 감옥에 가두고 생명의 위협을 가한 나라에 그대로 남았어야 했다는 것은 억지일 뿐이다. 의원들의 월북은 그들이 프락치였기 때문이 아니라 프락치 사건의 결과였을 뿐이다.
노일환은 월북한 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등에서 활동하다가 1958년 숙청된 후 1982년 5월 10일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묘소는 평양특별시 용성구역에 있는 재북인사 특설묘지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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