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태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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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태풍
  • 김효진 이장
  • 승인 2019.09.10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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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풍산 두지마을 이장

창문을 열지 못할 만큼 바깥바람의 위세는 대단했다. 창유리를 두드리는 바람 소리에 새벽 내내 몸만 뒤척일 뿐 좀처럼 잠을 들지 못했다. 동이 트고 바깥 풍경이 드러나자, 앞집 뒤꼍에 있는 감나무가 몸살을 한다. 집 밖 출입을 자제하라는 뉴스 보도를 애써 뒤로하고 삽 한 자루 들고 들녘으로 나섰다. 여기저기 논에는 벼들이 춤추듯 넘실댄다. 주인네들이 뒤척이며 새벽녘을 보낼 때, 이 들녘은 발가벗은 몸으로 분투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자식새끼 보듯 마음이 아려왔다. 한참동안 논 속에서 도망도 못치고 제자리에 서 있는 벼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나도 논 한 가운데 들어가 저들의 허리춤이라도 붙잡고 함께 비바람을 견뎌내야 하는 게 도리가 아닌지, 이내 격하게 감정이입이 되고 만다.

새벽부터 예상했듯, 들녘 여기저기 벼들이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상당히 드러누웠다. 유등 가는 길 옆 들녘을 향하던 중, 저 멀리 길가에서 몇 사람이 전봇대를 부여잡고 있다. 다가가 보니 풍산면사무소 총무계 직원들이 바람에 뿌리가 들썩이던 통신선 지주를 버티고 있었다. 전날 밤부터 비상근무 중이라던 공무원들의 노고가 새삼 느껴졌다. 단체에서 맡은 일이 많아 공무원들과 자주 아웅다웅 다투던 나로서는, 미안하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이 앞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을별 태풍피해를 면에 보고하라는 문자 수신을 확인했다. 쓰러진 논의 경작자를 대충은 아는 터라, 마을 방송 안내와 함께 피해 주민들에게 전화를 넣었다. 피해 농지의 필지 확인과 피해 정도를 파악하느라 정신없이 오후를 보내고 말았다. 결국 저녁 무렵 면사무소에 서류를 제출하며 산업계 직원에게 부질없게 군소리를 하고 말았다. 피해 구제책도 없으면서 해마다 피해 조사는 왜 하느냐며 툴툴거린 것이다. 겸연쩍긴 담당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나서는 길에 산업계에 한 통의 전화가 왔다. 풍산 농공단지에서 오폐수를 방류한 것 같다며 현장 확인을 나오라는 민원이 접수된 모양이다. 평일 같으면 퇴근 시간일 토요일 6시쯤, 현장으로 서둘러 나서는 산업계 직원들을 따라 무거운 마음으로 면사무소를 나왔다.

태풍이 몰아치는 계절엔 우리의 삶도 예측 불가능한 것임을 절실히 깨닫는다. 미시 영역에서나 논하던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인간의 오감이 작동하는 거시영역에서도 유효함을 우리는 우주 자연과 마주하며 인정하게 된다.
태풍이 하필이면 가을추수를 앞둔 이 시기에 오는 것은 무슨 조화이며, 내 논과 똑같이 거름 주고 농사짓는데 내 논과 달리 옆 논은 왜 멀쩡한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우주만유의 변화무쌍한 운동 속에서도 인간행위의 인과관계는 명확하다. 나락모가지 한 치라도 더 만들고 싶은 욕심에 거름을 더 넣었거나, 논바닥 말리는데 마음을 온전히 기울이지 못한 탓 일게다.
하늘과 조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게 농민의 팔자이고 또 그것이 드높은 품격을 지닌 참 삶이라지만, 태풍이 지나간 들녘을 바라보는 농민 중생의 마음은 한없이 먹먹하고 팍팍하다. 인간사에서 온갖 패악질을 해대고 힘없는 사람을 억누르는 기생충 같은 무리들은 세속의 부귀영화를 다 누리는데, 나름 ‘질서’를 체득한답시고 사는 우리 농민들의 삶은 왜 이리도 구차함과 오욕을 감당하는지 모르겠다.

다음날, 태풍 때문에 허망한 마음 가득한 주민들과 함께 추석맞이 마을 대청소를 마쳤다. 쓰러진 나락 때문에 들녘 쪽으로는 눈도 돌리기 싫다는 주민들에게 추석날 콩쿠르대회 노래 신청을 하라는 양으로 어설픈 변죽을 치자, 한 어르신은 그저 웃고 만다.

한가위 전야, 이 계절조차도 농촌은 그저 헛헛하고 쓸쓸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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