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20년전 … 꽃잎처럼 진 ‘치사 분신 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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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20년전 … 꽃잎처럼 진 ‘치사 분신 정국’
  • 신경호 기자
  • 승인 2011.04.27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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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학번 강경대ㆍ박승희ㆍ김귀정 열사 추모

사랑한 것이 너무도 많은데 / 교정을 비추던 5월의 햇살, 강의실, 친구들 / 그리고 어머니… 어머니… / 사랑할 것이 이다지도 많이 네겐 남아 있는데 / 강탈당했다 / 산맥 같은 스무 해 /4월 26일 네 젊음 갈기갈기 찢긴 그 날     - 강경대열사추모사업회 홈페이지에서

 

▲ 지난 1991년 5월18일 만장과 대형 영정을 앞세운 고 강경대 열사 운구행렬이 서울 서대문구 신촌로터리로 들어서고 있다.<한겨레 사진>

 

대학 1학년 강경대의 ‘죽음’이 촉발한 ‘분신정국’

20년전 1991년 봄. 강경대ㆍ김귀정ㆍ김기설ㆍ김영균ㆍ박승희ㆍ윤용하ㆍ천세용…죽음으로 시대의 아픔에 항변했던 열열 학도와 노동자들. 그들의 죽음은 정녕 ‘죽음의 굿판’에 불과했던 것일까.

1991년 4월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쓰러진 명지대 1학년 강경대 학생의 죽음은 그 뒤 이른바 ‘분신정국’으로 이어졌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주의의 진전을 기대했던 많은 이들은 노태우 정권의 공안 통치에 항거한 숱한 이들의 죽음을 겪으며 아주 오랫동안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야 했다. 이제 20년이 흘러 91학번 새내기들은 불혹(40대)의 나이가 됐다.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1991년은 어떤 기억과 의미로 남아 있는 걸까.

백골단이 명지대학교 교정 밖에 진을 치고 지랄탄과 최루탄이 날아들어 정신이 없었던 그 시절. “신입생 강경대가 백골단한테 맞아 죽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은 ‘원수를 갚겠다’는 분노로 분출돼 1991년 봄 ‘분신ㆍ치사정국’으로 이어졌다.

강경대 열사가 숨지고 사흘 뒤 분신한 전남대 박승희 학생을 기억하는 노훈오(43ㆍ광주서부와이엠시에이 문화센터장)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은 “마음이 아파 떠올리는 것조차 힘든 일이지만,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의 죽음을 기억하며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고 말했다.

10여명의 대학생과 노동자들이 죽어갔던 그 시절 새내기 대학생 91학번들에게는 선배 세대(80년대 학번 )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미묘한 감정이 존재하고 있는 듯하다. 대학 신입생 시절 강경대의 죽음을 접했고 그 울분으로, 조국의 미래와 민중의 생존권을 위해 거리로 나섰지만 학생운동의 쇠퇴와 동구권의 몰락을 지켜봐야 했고, 곧 바로 자유분방한 이른바 ‘엑스(X)세대’의 등장을 겪으며 느꼈던 당혹감도 뒤섞여 있다.

“(87학번) 형들 1학년 때 이한열이 죽었을 때에는 온 국민이 다 일어났고, 길거리에 나가면 다 박수쳤다는데, 우리 1학년 때는 강경대가 죽었고, 또 수없이 죽었는데,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얘기나 들었다.” ‘386’도 ‘신세대’도 아닌 이른바 ‘낀세대’라 불리는 91학번의 애환을 담은 연극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에 등장하는 대사다.

반면 (91년 분신정국을 지낸 후) 95년 전두환ㆍ노태우 전 대통령이 구속되는 역사적인 사건 등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려는 시각도 있다. “91년 이후 겪었던 혼란은 사회의 변화에 발맞춰 다른 형태의 진보를 찾기 위한 모색의 과정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추모제 곳곳서 투쟁 계승

이른바 ‘치사ㆍ분신정국’이라 불렸던 1991년 희생된 10여명의 열사를 기리는 작업이 활발하다. 강경대 열사 20주기 추모사업이 오는 23일 광주 망월동 묘역 참배를 시작으로 5월까지 잇따라 열릴 계획이다. 26일에는 명지대에서 ‘추모식 및 평전 출판 기념회’가, 5월 11일에는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추모단체 연대회의가 주관하는 ‘91년 5월 대투쟁 심포지엄’이 열린다. 또 5월 22일에는 광주와 경기 마석 모란공원에서 각각 박승희 열사 추모제와 김귀정 열사 추모제가 열리고, 30일 성균관대에서는 김귀정 열사 추모 평화콘서트가 열린다.

87년 6월 항쟁의 연장선에 있었던 1991년 봄 투쟁은 진정한 민주화를 염원했던 민중들의  노태우ㆍ김영삼ㆍ김종필의 야합으로 태어난 민자당(민주자유당) 정국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다.

진보학자들은 87년 6월 항쟁, 91년 봄 투쟁 등에 대한 계승은 우리 사회가 해결하지 못한 과제라고 진단한다. 또 이명박 정권이 이전 김대중ㆍ노무현 정부를 ‘잊어버린 10년’이라고 공격하면서도 정작 ‘표현의 자유 위축, 절차적 민주주의의 후퇴, 사회양극화와 비정규직의 증가 등 사회경제적 민주화는 정체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시점에서 91년 4ㆍ5월의 투쟁을 재평가하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정치적 ‘무기’로 사용한 ‘잊어버린 10년’이 아닌 열열 학도와 노동자들이 죽음으로 항거한 투쟁의 역사를 잊고 살아온 지난 20년을 되돌아보며 그 의미를 되새기고 실천할 때 정치적 민주주의는 물론 사회경제적 민주화 나아가 진정한 통일시대를 구현할 수 있다는 진단에 귀 기울여야 할 때다.

<열사> 나라를 위하여 절의를 굳게 지키며 충성을 다하여 싸운 사람. (네이버 사전)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일들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사람 혹은 자신의 뜻을 죽음으로써 펼친 사람.

<백골단(白骨團)> 시위를 진압하는 사복 경찰을 속되게 이르는 말.(네이버 사전) 전두환ㆍ노태우 전 대통령 집권시절 시위 진압 및 체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사복기동대.

■ 1991년 봄에 무슨 일이

경찰 진압에 꽃다운 열사 10명 산화
강경대ㆍ박승희ㆍ김영균ㆍ천세용ㆍ김기설ㆍ윤용하ㆍ김철수ㆍ이정순ㆍ정상순ㆍ김귀정

이른바 ‘치사ㆍ분신정국’이라 불렸던 91년 봄.

강경대ㆍ박승희ㆍ김귀정 등 10여명의 ‘열사’가 희생된 지 올해로 20주기를 맞았다. ‘열사’들의 투쟁은 87년 6월항쟁에 이어 90년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보수대연합 정권을 배경으로 한다.

20년전 1991년 봄, 사위어가는 6월항쟁의 민주주의 불꽃을 다시 피워 올리겠다는 젊은 민주화 세력들의 투쟁은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 죽음과 분신으로 이어졌다.

1991년 4월26일 명지대학교 1학년 강경대 열사가 시위 도중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뒤 이른바 ‘분신정국’을 겪게 된다.

사흘 뒤 전남대학교 학생 박승희씨가 학교에서 열린 규탄 집회 도중 “2만 학우 단결하라. 미국을 반대한다. 노태우정권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분신을 시도해 21일 만에 숨졌다.

절망에 빠진 젊은이들의 항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제 몸을 불살랐다. 5월 1일 안동대학교 김영균, 5월 3일 경원대학교 천세용, 5월 8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5월 10일 전남대학교 윤용하, 5월 18일 이정순, 5월 22일 정상순, 5월 25일 성균관대학교 김귀정도 시위 도중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

대학생들뿐 아니라 전남 보성고등학교 3학년이던 김철수는 5월 18일, 학교 운동장에서 ‘5ㆍ18 11돌 추모행사’ 중 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했고, 26일에도 당시 26살의 청년 정상순씨가 전남대 병원 영안실 옥상에서 “열사들의 뒤를 따르겠다”며 몸에 불을 붙였다. 그 시기 60일 동안 분신, 투신, 의문사로 죽어간 이들은 10여명에 이르렀고 그 6명이 광주 망월동 묘지에 묻혀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참혹했던 5월의 한복판에서 당시의 민주화운동세력들은 ‘고 강경대 열사 살인폭력 규탄과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로 결집했다. 노태우 정권은 6월항쟁 이후 분출하던 민주화운동, 노동자 등의 생존권 확보투쟁 등에 대처하기 위해 공안합동수사본부를 구성했고, 대대적인 탄압을 통해 5공 청산과 5ㆍ18 민중항쟁 진상규명 요구를 억누르려했다.

또 1990년도 초 3당 합당을 통해 국민들이 선택한 여소야대 정치지형을 인위적으로 변경하려 했다. 민자당은 5공의 주체였던 민정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결성된 정당이고 이후 민자당 총재가 된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기에 이르렀다.(이로써 야당은 김대중이 총재로 있던 평화민주당만 남게 된다).

1991년 봄. 젊은이들의 죽음은 노태우 정권의 반민주, 반인권적 정책과 탄압에 대한 저항이었다. 노태우 정권이 강경대 학생을 사망에 이르게 하자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운동세력이 총결집되는 계기가 된다. 이렇듯 6월항쟁 이후 최대의 인파를 거리로 불러 모았던 ‘치사ㆍ분신정국’은 6월초 외국어대 학생들이 당시 정원식 문교부장관에게 밀가루 세례를 퍼부어 여론의 반감을 사고 정권의 위기를 돌파하려는 공안세력의 ‘유서대필 조작사건’이 터지면서 사실상 잦아든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궁지에 몰리자 시위 강경 진압의 책임을 물어 안응모 내부부장관을 경질하는 등의 조치도 했으나 종국에는 김지하 시인의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조선일보> 장문의 칼럼, 박홍 신부(전 서강대 이사장)의 ‘죽음을 사주하는 어둠의 세력’ 발언 등 보수언론의 지원을 받아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검찰은 전민련 김기설 사회부장의 “유서 필적이 다르다”며 유서대필자로 당시 전민련 강기훈 총무부장를 지목해 기소했고, 이후 법원은 강씨에게 징역3년, 자격정지 1년6월을 선고했다. 16년 뒤 2007년 11월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강씨가 김씨의 유서를 대신 쓰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고 국가가 재심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희생자들에 대한 명목적인 명예는 회복되었을지라도 실질적인 배상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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