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곡]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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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곡] 봄날은 간다
  • 선산곡
  • 승인 2011.05.04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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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 3일의 짧은 기간을 산자락 안에서 머물기로 했다. 야영장의 첫날밤은 생각보다 싸늘했지만 이튿날 산마루를 타고 내려온 봄 햇살은 어느새 따가워져 있었다. 사진기를 챙겨들고 아침나절 아내와 함께 제법 먼 길을 걸었다. 계곡 언저리의 산길을 따라 걷는 동안 물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길을 걷는다기보다 물소리를 따라 걷는 기분이었다.

진달래는 이미 졌지만 수달래가 막 꽃술을 내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아름다운 것은 신록의 수려함이었다. 비슷하지만 제각각 다른 푸른빛이 온 산을 수놓고 있었다.

봄은 어느 길을 따라 흐르는 것일까. 이 봄이 가고 있었다. 그 길을 따라 걷는 동안 가슴에 내내 우러나는 노래를 나는 흥얼거리고 있었다. 세월의 흐름이 아닌, 이미 고전이 돼버린 우리가요 하나가 명사처럼 굳어진 말이었다.

‘봄날은 간다.’

가수 백설희가 불렀던 노래다. 애절하고 슬픈 곡조다. 한 시대, 한 계절, 어떤 노래를 좋아하게 됨이 어찌 가수 때문이랴. 그 노래를 나만큼 잘 부르는 사람도 드물다. 그 오만을 굳이 변명할 생각은 없다. 내 인생의 걸음, 내 분위기에 맞게 부른다는 말이다. 스스로 도취되어 부른다는 말이 차라리 옳다.

정말 이 노래를 잘 부르는 분들 많다. 원조인 진짜 가수 백설희씨는 말할 것도 없지만 내 가까운 이웃들과 돌아온 용팔이도 친절한 금자씨도 이 노래를 잘 부를 것이다. 순위를 매길 수 있는 것도 아닌 이상, 내가 ‘제일’ 잘 부른다고 말할 수 있는 이 작은 애교를 용서하시라.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라는 가사가 있다. 열아홉의 몇 갑절을 지낸 나이이면서 그 삶의 길이만큼 얽혔던 희망도 회억도 한 덩어리가 된다. 그 짧은 두 어절이 내 심중에 파고드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이 말은 영화로도 책의 제목으로도 자주 쓰인다. 나 역시 십 수 년 전 같은 제목으로 졸작의 수필을 쓴 적이 있다.

얼마 전 친구가 이 노래를 보내왔다. 편리한 세상이라 메일에 묻어 온 노래였다. 한영애의 음역도 싫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이 아렸다. 메일을 보낸 사람은 암 투병 중이었다. 얼마 있지 않으면 가고 말 자신의 걸음이었을까. 아니면 이미 가버린 봄날에 대한 회한이었을까.

얼마 후 정말 친구의 봄날은 갔다. 그가 가버린 뒤의 쓸쓸함, 그 빈자리에서 알 수 없는 분노까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산천의 빛깔은 늘 아름답다. 그 복판에 우리는 서 있다. 청춘은 봄이었지만 영락을 따라감이 대수인가. 크고 작은 시차를 두는 것뿐, 우리 모두에게 봄은 가고 있다. 봄만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고 있는 길이요, 인생이 가는 길일뿐이다. 그래서 슬펐던 친구의 부재를 이제는 잊기로 했던 것이다.

전화기에 신호가 떴다. 고향의 후배가 보낸 문자다.

‘눈 빠지게 시린 산하를 두고 이 마음이 타지 못한다면 사랑이 아닐 것 같습니다.’

이 산하에 꽃들만 활활 타는 게 아니다. 꽃들도 지치게 하는 푸른빛이 차라리 눈 빠지게 시다는 뜻이었을 게다. 그리운 사람들이 함께 하는 세상에 사랑이 그렇게 먼 거리 밖에 있으리란 체념은 하지 않아야한다.

봄날이 간다. 모두에게 봄은 있고 모두에게 가고 있는 봄이다. 그러나 해마다 또다시 봄은 오는 것. 지금 이 봄이 가고 있는 것.

봄, 봄날이 간다.

 

 

선산곡
- 전북 순창
- 한국문인협회회원
- 회문 동인
- 전북수필문학회장 역임
- 수필집 : LA 쑥대머리
           끽주만필
           속아도 꿈 속여도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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