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서 김인후 … 호남성리학의 유종(儒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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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 김인후 … 호남성리학의 유종(儒宗)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10.09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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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열전 (19)
▲하서 김인후 선생이 명종 3년(1548년)에 순창 점암촌 백방산 자락에 지은 강학당 훈몽재 전경.

 

‘호남 남쪽에는 김인후, 호남 북쪽에는 이항, 영남에는 이황, 충청에는 조식, 서울에는 이이가 버티고 있다’는 역사서의 기록처럼 하서 김인후는 조선 성리학의 거목이다. 김인후는 전남 장성 사람이다. 그가 쌍치면 점암촌 훈몽재에서 강학하며 순창에 머문 기간은 2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가 세우고 강학한 순창 훈몽재가 그의 학문적 업적과 정신을 오롯이 전승ㆍ발전시키고 있고, 유학 등 전통문화 교육장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고 있기에 김인후를 순창의 인물로 소개하고자 한다.

▲하서 김인후 초상화.
▲하서 김인후 초상화.

 

가계와 어린 시절

김인후(金麟厚, 1510~1560)는 본관은 울산이며,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ㆍ담재(湛齋),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510년(중종 5) 전남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맥동마을에서 아버지 의릉참봉 김령과 어머니 옥천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4세에 진안현감 윤임형(尹任衡)의 딸 여흥 윤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다.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는 그의 15대손이다
김인후는 5세부터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6세에는 <영천시>(詠天詩, 하늘을 읊은 시)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어떤 손님이 와서 하늘을 가리키며 하늘 천(天)자로 글제를 삼아 시를 지어 보라고 했다. 어린 김인후는 “모양은 둥글어 지극히 크고 또 지극히 현묘한데/ 넓고 빈 것이 땅의 주변을 둘렀도다/ 덮혀 있는 그 가운데 만물을 용납하는데/ 기(杞) 나라 사람은 어찌하여 하늘 무너질까 걱정했던고(形圓至大又窮玄 浩浩空空繞地邊 覆幃中間容萬物 杞國何爲恐顚連)”라고 즉석에서 대답했다. 옛날 기 나라의 어떤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면 어떻게 할까.” 하고,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고 하는데, 기우(杞憂)라는 의미를 여섯 살 때 깨우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고 <명종실록>에 전한다.
천재로 이름났지만, 공부에 게으르지 않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당대의 석학들을 찾아 학문에 정성을 바쳤다. 10세 때 전라도 관찰사로 와있던 모재 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웠고, 17세 때는 면앙정 송순을 찾아 수업했으며, 18세 때는 기묘사화를 만나 화순 동복에 유배 중이던 신재 최산두를 찾아가 배우며 학문의 폭을 넓혀 나갔다.
19세(1528년ㆍ중종 23)에 서울에 올라가 성균관에 입학했고 22세 성균 사마시에 합격했다. 24세에 진사과에 합격했고 이때 성균관에서 퇴계 이황과 만나면서 평생의 학문적 동지가 된다. 후일 퇴계는 “더불어 교유한 자는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었다”고 술회했을 정도로 그와의 돈독한 우의를 표시했다. 31세에 별시 문과에 급제해 벼슬살이가 시작된다. 이후 32세에는 초급 관리로 가장 명예로운 사가독서(賜暇讀書)의 기회를 얻어 호당(湖堂)에 들어가 학문연찬에 정력을 바친다.


세자와 인연, 인생행로를 바꾸다

1543년(중종38)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ㆍ홍문관부수찬이 되어 세자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직임을 맡았다. 이때 맺어진 세자와의 인연은 그의 인생행로에서 결정적인 작용을 하게 된다. 스승은 성군의 자질을 흠모했고, 세자는 김인후의 인품과 학문에 매료돼 온갖 예우를 다 했으니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마음을 열었다.
세자는 김인후에게 1543년(중종 38년) 수입된, 성리학의 전범인 《주자대전》 한 질을 하사한다. 아마도 ‘훗날 내(인종)가 옥좌 위에 오르면 국가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의 해석을 그대에게 맡기려 한다’는 깊은 뜻을 담았을 것이다. 또 세자는 비단 위에 손수 대나무를 그린 ‘묵죽도(墨竹圖)’를 하사하고 김인후에게 화축에다 시를 지어 쓰도록 했다. 이것은 임금 될 사람으로서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친절이었다.

국정농단세력이 내린 관직은 거부한다

1543년(중종 38) 8월 김인후는 기묘사화에 억울하게 죽은 조광조 등을 사면해 신원시키라는, 그때까지 감히 아무도 말하지 못하던 정책을 건의한다. 하지만 중종은 김인후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기묘명현(己卯名賢, 기묘사화 때 희생된 사림인사들)의 신원 복원이 이루어 지지 않자 12월에 연로하신 부모를 뵙는다고 청원해 고향에서 가까운 옥과현감으로 나갔다.
1544년 11월 중종이 승하하고 이듬해 세자가 즉위하니, 그가 인종이다. 그러나 세종 못지않게 선정을 베풀 것으로 만인에게 기대 받던 인종은 즉위한 그 해 7월에 갑자기 승하하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김인후는 대성통곡하고 곧바로 옥과현감을 사직했다.
명종의 등극과 함께 소윤파 윤원형 등이 대윤파 윤임 등을 공격하는 을사사화(1545년)가 일어나 잔혹한 피의 숙청이 자행되고 이후 20년간 문정왕후와 소윤 무리의 국정농단이 이어졌다. 고향으로 돌아온 김인후는 8번이나 명종의 부름을 받았지만 발에 습종(붓는 병)이 났다는 등 여러 핑계를 대면서 죽을 때까지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훈몽재 훈학…2009년 순창군 중건

요순시대를 꿈꾸며 학문과 수양에 힘썼던 김인후는 인종이 승하한 36세 이후, 영원히 서울을 떠나 고향인 장성과 그 이웃 고을인 순창의 자연 속에 몸을 숨기고 강학과 교육과 시작(詩作)으로 평생을 보내게 된다.
김인후는 1548년(명종 3) 부모와 처자식을 거느리고 처가가 있는 쌍치면 둔전리 점암촌에 이거한다. 초당을 세워 ‘훈몽(訓蒙)’이라는 편액을 걸고 조희문ㆍ양자징ㆍ변성온ㆍ정철 등 여러 제자들을 훈회하고 강학했다. 다음 해 봄에 《대학강의》 발문을 짓고, 정지운의 《천명도》를 얻어 보고 이를 대폭 수정 보완해 인성의 본질을 파헤치는 탁견을 제시한 《천명도》(天命圖, 성리학의 이치를 설명한 그림)를 저술하여 조선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0월에 부친상을 당해 12월에 고향 장성으로 되돌아갔다. 
훈몽재는 1680년경 5대손인 김시서가 인근에 기거하며 중건했고, 1820년경 후손들이 퇴락한 훈몽재를 다시 중건했다. 1951년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으나, 순창군에서 김인후의 학문적 업적과 정신을 계승하고 전통문화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현재의 위치에 2009년 11월 9일 중건했다. 2012년 11월 2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다.

성리학자, 호남 출신 유일 문묘에 종사

그의 성리학 이론은 16세기 조선 성리학계를 이끈 대표적 이론으로 자리 잡아 우리나라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성리학설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으로 주리론(主理論)적 입장이었으며 수행론 방면으로는 ‘경(敬)’을 강조했다. 그의 학문은 의리를 실천하는 데에 있다. 기묘사림의 문하에서 성장하고 그 정신을 계승함으로써 호남유학 발전의 토대를 쌓게 된다.
그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을 뿐 아니라, 천문ㆍ지리ㆍ의약ㆍ복서ㆍ율려ㆍ도수에도 정통했고, 16세기 누정 문학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시인이기도 해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겼다. 저술로는 문집인《하서전집》이외에 《주역관상편》ㆍ《서명사천도》ㆍ《홍범설시작괘도》등이 있다. 1560년(명종 15) 정월 16일 51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호남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문묘에 종사된 18현(안향ㆍ정몽주ㆍ조광조ㆍ이황ㆍ이이 등) 중 한 사람이다.

림재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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