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현대사(10) 1969년의 대중가요와 한국사회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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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현대사(10) 1969년의 대중가요와 한국사회②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10.16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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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와 함께 살펴본 20세기 후반의 한국사회(10)

1960년대 말 대중가요는 이미자와 남진, 배호에 신인가수 나훈아까지 등장하는 등 트로트가 여전히 압도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트로트인 소울, 팝, 포크 가수인 펄시스터즈, 김추자, 조영남, 트윈폴리오(송창식, 윤형주) 등이 얼굴을 내밀며 가요계에 새 바람을 몰고 왔다. 당시 신문과 잡지의 가요 관련 기사에서도 가요계 세대교체와 변화를 기대하는 내용을 자주 볼 수 있다.
 

▲나훈아 <사랑은 눈물의 씨앗>.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

당시, 촉망받는 신인가수에 불과했던 나훈아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히트하며 몇 년 후 남진에게 필적하는 라이벌로 떠오르게 된다. 사랑에 관해 정의를 내린 이 노래는 오랜 기간 동안 유행어가 되어 각광받았다,
나훈아가 긴 무명생활을 끝내고 스타로 떠오른 데는 타고난 노래 실력뿐만 아니라 행운이 함께 한 면도 적지 않았다. 당시 배호는 병마에 신음하며 악전고투 중이었고, 인기절정의 남진은 베트남에서 군복무 중이었다. 나훈아는 이 틈새를 놓치지 않고 <사랑은 눈물의 씨앗> 이후 <임 그리워>, <잊을 수가 있을까>를 연달아 히트시키며 가요계를 석권하기 시작한다.

▲이종환 디제이(DJ).

음악감상실과 디제이 시대 개막

팝송을 통해 세계 젊은이들의 흐름을 읽었던 1960년대, 음악감상실 돌체ㆍ쎄시봉ㆍ아카데미ㆍ르네상스 등은 예술인들의 집결지인 동시에 젊은이들의 문화가 생성되고 새로운 음악이 전파되는 중심지였다.
음악감상실이 새로운 문화 발신지로 떠오르자 문화방송(MBC), 기독교방송(CBS), 동아방송(DBS) 등은 60년대 초ㆍ중반부터 전화 음악퀴즈프로를 기획해 청취자들을 전화로 연결해 방송에 참여시키거나 백화점 등에 스튜디오를 설치하며 젊은이들의 현장에 가까이 다가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디제이(DJ, 음반지기)방송 프로그램은 1964년 10월 1일 첫 방송을 시작한 동아방송 최동욱의 ‘탑튠쇼’다. 이어서 1965년 문화방송(MBC)의 이종환, 라디오서울의 피세영 등 ‘디제이 트로이카’ 시대가 도래한다.
‘별이 빛나는 밤에’, ‘한밤의 음악편지’(문화방송), ‘밤을 잊은 그대에게’(동양방송), ‘영시의 다이얼’(동아방송), ‘꿈과 음악 사이에’(기독교방송) 등 심야 음악프로그램과 70년대 이후의 ‘두시의 데이트 김기덕입니다’,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박원웅과 함께’ 등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 이름만으로도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최동욱ㆍ이종환ㆍ임국희ㆍ김세원에서 박원웅ㆍ김광한ㆍ김기덕으로 이어지는 방송 디제이 계보에 70년대의 이장희ㆍ윤형주ㆍ박인희ㆍ양희은, 80년대 이후의 배철수ㆍ이문세 등 인기가수들까지 가세하며 청년문화를 이끌었다.
방송을 듣지 않으면 다음날 친구들과 대화가 통하지 않을 정도였고, 급기야 청소년들에게 끼치는 심야방송의 영향이 사회문제로 비화돼 논란이 일기도 했다.
청소년들은 신청곡 엽서에 그림을 그리고 예쁜 글씨로 사연을 적어 신청음악을 보냈고, 엽서가 방송이라도 타게 되면 다음날 학교에서 어깨를 으쓱하며 자랑하기 바빴다. 어느 방송 누구의 프로그램을 들어야 된다느니 하는 편 가르기도 비일비재했다.

광주 음악감상실과 심야방송

광주권에서는 1960년대 후반 무렵, ‘카네기’ 음악감상실이 현 충장로 1가 조선대학교 동창회관 5층에 선을 보였다. 광주 음악감상실의 시작이었다.
서울의 최동욱, 이종환, 피세영 처럼 광주에도 1972년부터 문화방송(MBC) ‘별이 빛나는 밤에’ 소수옥, 기독교방송(CBS) ‘꿈과 음악사이’ 정무일, 전일방송(VOC) ‘밤을 잊은 그대에게’ 이상옥 등 3명이 방송 디제이 트로이카로서의 면목을 과시하며 인기를 끌었다. 그 중에서도 ‘별이 빛나는 밤에’를 진행했던 소수옥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통기타음악의 못자리 ‘싱어롱 와이’

대중음악 평론가들은 우리나라에 통기타 붐이 처음 일기 시작한 출발지점을 ‘싱어롱 와이(Y)’로 보고 있다. 1965년에 시작된 이 ‘다함께 노래 부르기’ 캠페인은 레크리에이션 문화를 탄생시키며 ‘너도나도 기타 배우기 붐’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노래 문화를 바꿔놓은 ‘싱어롱 와이’는 1963년, 와이엠시에이(YMCA) 김창열 총무와 전석환에 의해 YMCA 강당에서 시작되었다. 참가자가 점차 늘며 반응이 커지자 65년 9월, 동아방송(DBS)이 ‘다함께 노래하자’라는 프로그램을 신설, 공개방송으로 진행되었다. 이어 1966년 7월부터 한국방송(KBS)-TV를 통해 ‘노래의 메아리’ 등으로 제작되며 전국 직장과 학교를 순회하는 공개방송으로 진행되었다.
<사모하는 마음>, <석별의 정>, <정든 그 노래>, <꼬불꼬불> 등 외국 민요와 팝, 그리고 우리 민요를 오르간과 기타로 쉽게 반주할 수 있도록 편곡해 보급했다. 이 노래들 대부분은 미군 장교클럽에서 음악 활동을 했던 전석환이 채보, 발굴했다. 전석환은 ‘전 국민의 음악선생’이었던 셈이다.
전국적으로 화제를 모은 이 ‘싱어롱 와이’와 때를 같이해 통기타 붐이 일기 시작했다. ‘기타 1주일 완성’이라는 기타학원과 기타교본이 속속 등장했고 노래책마다 기타 코드가 실리기 시작했다. ‘기타 못 치면 간첩’이라는 말이 유행하며 대한민국 노래문화는 포크송, 통기타 음악 시대로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트윈폴리오 앨범.

포크송시대를 연, 트윈폴리오

70년대를 휩쓴 포크송 붐은 송창식과 윤형주로 구성된 ‘트윈폴리오’로부터 시작되었다. ‘흙과 바람으로 빚은 듯한 목소리’라는 평가를 받는 송창식과 ‘창공의 맑은 공기 같은’ 미성의 소유자 윤형주. 느낌이 확연히 다른 이 둘은 듀엣으로서 더없는 조건을 갖추며 멋진 화음을 구사했다.
팝을 듣고 자란 60년대 말의 세대는 이전과 다른 문화를 갈구하고 있었다. 비록 번안곡들 이었지만 화음을 맞춘 트윈폴리오가 부른 <하얀 손수건>, <축제의 노래>, <웨딩 케익>, <더욱더 사랑해> 등은 팝문화에 젖어있던 10대들과 젊은이들의 감성의 빗장을 열었다. 급기야 우리나라 가요팬들을 기존 층과 10대 위주 젊은 층으로 이등분시켰다.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은 못했으나 서울예술고등학교에 수석 입학했던 송창식과 연세대 의대에 재학하던 윤형주는 이후 각각 솔로로 활동하며 ‘통기타 1세대’로서 70년대 청년문화를 주도한다. 1971년 송창식은 <창 밖에는 비 오고요>를 제목으로 독집 음반을 발표했고, 윤형주도 이듬해 <라라라>(조개 껍질 묶어∼)를 발표하며 활동을 전개했다.
림재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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