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분다(14)/ 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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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분다(14)/ 야곡
  • 선산곡
  • 승인 2019.10.24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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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곡(夜曲)

인사동 거리를 걸었다. 짧지 않은 거리에 가을을 알리는 바람이 불었다. 벌써 몇 번, 이 거리를 거니는 것이 익숙해졌다. 서울에 정기검진을 받으러 가는 날은 언제나 동도 트기 전 새벽에 출발해야한다. 검진이 끝나는 시간은 오전, 아들이 회사에서 퇴근할 때까지 남은 시간이 만만치 않게 길다. 그 시간을 고궁이나 박물관을 두루 섭렵하는 관광객이 된다. 저물 무렵 아들이 지하철을 타고 가장 내리기 쉬운 장소가 인사동 안국역이다. 그 거리에서 우리의 단골이 된 식당과 커피숍에서 시간을 보낸 후 심야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하루가 이젠 가족행사가 되었다.
딸과 아내는 뒤따라오고 아들과 내가 앞서서 걸었다. 저녁을 마치고 커피숍을 가는 차 없는 거리였다. 도자기를 파는 가게 앞, 돌로 된 사각벤치위에 장미꽃다발 하나가 놓여있었다. 불과 1시간 전, 내가 앉아 쉬기도 했던 자리였다.
“옛날 노래가 있었지.”
“무슨 노래?”
어떤 노래를 작게 흥얼거렸다. 아들이 듣고 있었다. 50년대, 정확히는 49년 서울거리의 애환을 노래했던 탱고음악이었다. 충무로, 보신각, 명동의 지명들과 쇼윈도글라스, 마로니에, 네온, 레인코트, 베가본드 등의 외래어가 자연스럽게 섞여있어 당시의 화이트칼라 분위기가 짙은 노래다. 전쟁이 끝난 뒤 50년대, 서구식음악이 뿌리내리기 시작했을 때의 가요 중 세련된 곡들이 많았다. 이 노래도 그 중 하나. 우리 가요사를 논할 충분한 근거와 지식은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내 장황한 설명을 아들은 듣고 있었다.
“저 꽃다발은 누가 버렸을까. 인사동 거리에 버려진 꽃다발….”
아들은 빙그레 웃었다. 조금 더 흥얼거리다가
“제목이 아마도 ‘서울 엘레지’ 같다.”
그렇게 거리의 이야기는 끝났다. 커피숍에서 1시간. 그리고 지하철역에서 아들을 보내는 마음이 무거웠다. 돌아와서 생각하니 그 노래의 제목이 서울 엘레지가 아니고 <서울야곡>이었다. 밤 내린 서울거리에 버리고 간 꽃다발과 찢어 버린 편지. 그리고 사랑은 끝났다는 노랫말. 서울에서 꽃다발 하나로 내 가슴이 젖었다면 지나친 과장인가. 그 옛날 짧았던 내 서울 살이는 고작 100일이었다. 청년의 눈에 늘 아팠고 늘 슬프기만 했던 서울의 밤. 버려진 것이 슬프게 그리고 아름답게 남은 서울의 밤은 예전 그대로였다. 3절 마지막, 오늘밤도 울어야 하나를 탄식 섞어 부르는 야곡(夜曲)의 절정을 아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일까만.

네온도 꺼져가는 명동의 밤거리에
어느 님이 버리셨나, 흩어진 꽃다발
레인코트 깃을 올리며 오늘밤도 울어야 하나
베가본드 마음이 아픈 서울 엘레지

통속도 아니고 저급도 아니다. 작은 드라마다. <서울 야곡>. 유호 작사, 현인(동주)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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