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19) 백수 양응수, 성리학의 맥 이은 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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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19) 백수 양응수, 성리학의 맥 이은 유학자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10.24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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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白水) 양응수(楊應秀, 1700-1767)는 하서 김인후 이후 단절되다시피 했던 순창 성리학의 맥을 이은 18세기 성리학자다. 본관은 남원, 자는 계달(季達), 호는 백수(白水)이다. 아버지는 승의랑 양처기(楊處基)이고, 어머니는 강화최씨 최휴지(崔休之)의 딸이다. 적성면 괴정리 서림마을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4년 후인 13세 때는 어머니마저 잃게 되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부모를 봉양하지 못한 불효의 죄책감으로 평생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으며 비단옷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고, 후진 지도에도 정성을 쏟았다. 29세에 이르러서야 장성에 살고 있던 신말주의 후예인 고령신씨 신선흡의 딸과 혼인했다. 34세에는 서림마을에서 풍산면 향가리로 거처를 옮겼다. 근처의 제자들이 주선하여 집을 마련하고 생활이 어려운 스승을 모셔간 것이었다. 

▲양응수가 태어난 적성면 괴정리 서림마을 전경(향토문화대전 사진)

 

도암 이재(李縡)의 수제자

양응수는 어릴 때는 순창에 살고 있던 화산 권집(權緝)에게서 배웠다. 13세 때 아버지가 옆 마을에 살며 절친했던 권집에게 보내 학문의 기초를 닦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권집 문하가 된 지 불과 5년 만에 스승은 세상을 뜨고 만다.
이후 자습의 길을 걷다가 38세 되던 해 경기도 용인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던 도암 이재(李縡, 1680-1746)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재는 영조 때 노론 벽파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노론 내 낙론학맥을 계승 발전시킨 대학자였다. 그의 문하에는 조선 6대가의 한명으로 꼽히는 임성주를 비롯해 김원행, 송명흠 등 수많은 석학들이 모여들었다.
이재는 양응수의 학문적 자질이 있음을 알고 각별히 대우했고 양응수도 이재의 고매한 인품과 학덕에 심취해 그를 지성으로 섬겼다. 사제지간으로서 이재와 양응수는 마치 부자지간과 같아서 다른 제자들이 감히 넘볼 수 없었다고 한다. 백수(白水)라는 양응수의 호는 이재가 지어준 것이다. 어느 날 이재는 함께한 술자리에서 양응수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주었다.
“훈훈한 취흥 돋우며/ 경의를 담론하고/ 백발 날리며/ 시를 읊는구나(倚微醺 而談經 揚白鬚 而哦詩)”
이 글은 백발이 성성한 나이에도 학문에 정진하는 양응수를 보고 그의 기상을 아끼는 마음에서 이재가 지어준 것이다. 이때 그 글을 본 동문들이 양응수의 백발을 놀리며 양백수(楊白鬚)라 부르곤 했다. 이를 본 이재가 양응수의 호를 ‘백수(白水)’라 지어주었다. 이는 양응수가 흰 호수 위에 정사(풍산면 향가리의 백수정와)를 짓고 살았기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그의 청아한 심성을 뜻한다고 유언집(兪彦鏶, 이재 문하에서 양응수와 동문수학함)이 <행장>에서 밝히고 있다.
양응수의 나이 48세 때 스승 이재가 별세하자 그는 자기 부모를 잃은 것같이 애통해 하며, 묘 아래 막을 짓고 1년 간 시묘했다. 이재 문하에서 빼어난 제자들이 많이 나왔지만 정작 이재 말년의 유훈을 받고, 그 도와 학문을 온전히 지킨 수제자는 이들이 아니고 양응수였다. 유언집은 <행장>에서 ‘주자(朱子) 문하에서 성리에 대해서는 북계 진순이 으뜸이라고 하는데 이재 문하에서는 양응수가 으뜸이다’고 적고 있다.

평생 벼슬을 거부하고 학문에만 매진

18세기 중엽 노론 내부에서 분파가 생겨 이른바 호락논쟁(湖洛論爭)이 일어났다. 호락논쟁이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을 같은 것으로 보는가 다른 것으로 보는가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으로, ‘인물성 동이논쟁(人物性 同異論爭)’이라고도 부른다.
한원진 등 호론(湖論, 충청도 노론)은 인성과 물성은 다르다고 보았다. 이는 청(淸)을 오랑캐로, 조선을 중화로 보려는 대의명분론이 근저에 깔려 있다. 이에 비해 김창협, 이재 등이 중심이 된 낙론(洛論, 서울 노론)은 인성과 물성이 같다고 보았다. 모든 사람과 만물은 보편적 이치를 추구하려는 성격이 있다고 생각했고, 이로 인해 대체로 북학파의 과학 기술 존중과 이용후생사상으로 발전했다.
양응수는 스승 이재와 마찬가지로 인물성동이론에서는 낙론을 지지했으며, 이재의 ‘일리이기(一理二氣)’설을 계승했다. 또한 사람의 몸에는 혼백 또는 혈기가 있으며, 마음에는 이(理)와 지각(知覺)이 겸해 있다고 전제하고, 본연지기(本然之氣)와 혈기지기(血氣之氣)가 교합됨으로써 지각의 묘를 생한다는 <이기설(二氣說)>과 <지각설변(知覺說辨)>을 지었다.
일찍이 벼슬길에 뜻을 버리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오로지 자신의 학문 연마와 후진 교육에 힘썼다. 그의 학덕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1755년(영조 31)에 호남 암행어사의 특별 천거로 건원릉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그 이듬해 익위사부솔로 임명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독서이론을 집대성하다

양응수의 문집 《백수집(白水集)》 권26 <위학대요(爲學大要)>편에 수록된 ‘독서법’에는 독서 방법이나 효과 등이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양응수는 독서의 궁극적 목적을 성인의 도를 배워서 누구나 성인이 되는데 두었다. “어찌 옛 사람이 아는 것을 나라고 해서 모를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도학을 공부하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양응수는 독서의 순서를 제시하였다. 제일 먼저 《소학》을 읽어 일상생활의 기본 도리를 익힌다. 다음으로 사서(四書) 가운데 《대학》ㆍ《논어》ㆍ《맹자》ㆍ《중용》의 순서로 읽고, 그리고 오경 가운데 《시경》ㆍ《예기》ㆍ《서경》ㆍ《역경》ㆍ《춘추》의 순서로 읽어 성현의 말씀을 공부하고, 제자백가와 잡학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독서를 해나갈 것을 권장했다.
“독서란 비유컨대 집을 구경하는 것과 같다. 만약 바깥에서 집을 보고 나서 보았다고 말한다면 알 길이 없다. 모름지기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하나 보아, 방은 몇 칸이나 되고, 창문은 몇 개인지 살펴야 한다. 자꾸자꾸 보아서 통째로 기억이 나야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독서는 모르던 것을 아는 지식의 성취뿐만 아니라, 독서를 통한 생활의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을 때라야 비로소 진정한 독서의 효과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독서 후에도 생활의 변화가 없으면 독서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양응수의 독서법은 글을 읽을 때 유념해야 할 구체적인 내용과 유의점을 설명하고 있어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섬진강 자락 백수정와(호호정)

섬진강 자락(순창 적성강에서 곡성 순자강까지)에는 오곡(五曲, 백수정와ㆍ합강정ㆍ무진정ㆍ호연정ㆍ청계정)이 있었다. 그 중 제1곡이 백수정와(白水精窩)였다. 양응수가 풍산면 향가리로 이주한 뒤 42세(1742년) 때 옥출산 자락 풍산면 향가리 백호(白湖, 흰 호수) 가에 정자를 지어 후학을 가르쳤다. 스승 이재가 이때 ‘백수정와(白水精窩)’란 휘호를 내려줬다. 백수정와는 후에 ‘호호정(浩浩亭)’으로 바뀌었다. 이곳은 약 100여 년간 후학을 가르치는 전당이자 서울 관원의 출입이 빈번했던 유림의 집합소 역할을 했던 공간이었다.
양응수는 말년에 박성원ㆍ김원행ㆍ송명흠 등 당시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767년(영조 31) 정월에 향년 68세로 운명했다. 1808년(순조 8) 사림들의 건의로 적성면 지북에 지계서원(芝溪書院)을 세워 그의 선조 양배(楊培)와 함께 제사했다.
저서로는 《백수문집(白水文集)》 30권 17책이 전해오고 있다. 또한 그의 서간집(書簡集)인 《백수서간선(白水書簡選)》이 전북대학교박물관에 의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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