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의 대중가요와 한국사회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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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의 대중가요와 한국사회③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10.3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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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손석우.
▲작곡가 박춘석.

 

▲한국 록 음악의 대부로 불린 신중현.

 

1960년대를 이끈 작곡가들

1960년대 한국대중가요는 식민지시대부터 대중들의 인기를 끌어온 기존의 트로트와 신민요에 미국식 팝 계열 음악이 공존하며 다양해졌다. 거기에 뛰어난 실력을 지닌 가수들이 대거 등장했으며, 12인치 엘피(LP) 앨범이 본격적으로 제작되면서 산업적 규모와 시장성이 커진 시기였다. 음악적 구성에서도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시도와 결과물들이 쏟아졌다.
한국대중음악의 르네상스라 불리며, 케이팝으로 세계무대에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오늘날 한국대중음악의 밑바탕이 된 1960년대 대중가요 작곡가들을 소개한다.

손석우, 대중가요 수준 격상

‘한국 최초의 팝 작가’라 불리며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스탠더드 팝 스타일의 밝은 노래로 한국대중가요의 새 시대를 연 작곡가 손석우.
1950년대 중후반 <나 하나의 사랑>(송민도)을 비롯해 드라마 주제가 제1호인 <청실홍실>(안다성 송민도), <나는 가야지>(문정숙), <검은 장갑>(손시향) 같은 명곡들을 발표했다.
60년대에도 그의 전성기는 계속된다. 우리 가요의 흐름을 바꿔놓았다고 평가받는 <노란 샤쓰의 사나이>, <우리 마을>, <눈이 내리는데>(한명숙), <이별의 종착역>(손시향),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최희준), <사랑했는데>(이미자) 등을 발표했다. ‘평생 사랑만 하며 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노랫말과 멜로디에 담긴 감성은 지금도 감동을 안겨준다.

박춘석, 한국의 모차르트

박춘석은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한국 대중음악을 지배한 통치자였다. 수려한 멜로디로 식민지시대 유산인 트로트와 해방 후 상륙한 팝음악의 경계를 넘나들며 양쪽 모두를 지배한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였다. 60년대와 7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의 빅4였던 이미자와 패티김, 남진과 나훈아가 모두 박춘석 사단의 일원이었고 그가 배출한 가수는 350여 명에 이른다.
그는 1954년 <황혼의 에레지>(최양숙이 1965년에 리메이크)로 데뷔했다. 이어 1956년 <비 내리는 호남선>(손인호), <바닷가에서> <사랑이 메아리칠 때>(안다성),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곽순옥) 등을 발표하며 음악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는다.
박춘석은 1964년 지구레코드사로 전속을 옮기며 트로트로 급선회한다. 이미자와의 콤비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섬마을 선생님>, <흑산도 아가씨>, <황혼의 블루스>, <그리움은 가슴마다>, <한 번 준 마음인데>, <기러기아빠> 등 이미자와 콤비를 이뤄 발표한 곡이 무려 7백 여곡이다. 60년대 중후반 당시 ‘지구+박춘석+이미자’는 빅 히트 공식이었다.
남진도 히트곡 대부분이 박춘석 작품이다. <가슴 아프게>, <마음이 고와야지>, <우수>, <별아 내 가슴에>, <지금 그 사람은>, <나에게 애인이 있다면>, <빈잔> 등이 있다.
패티김과도 <초우>, <가을을 남기고간 사랑>, <가시나무새> 등의 명곡을 남겼고, 문주란의 <타인들>, <공항의 이별>, 최양숙 <호반에서 만난 사람>, 은방울자매 <마포종점> 등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며 명성을 날렸다. 배호 <만나면 괴로워>, 펄시스터즈 <슬퍼도 떠나주마>, 나훈아 <물레방아 도는데>, 하춘화 <하동포구 아가씨> 등과도 손잡고 히트곡 행진을 계속했다. ‘어떤 가수도 박춘석에게 픽업되면 성공한다’는 등식까지 성립되었고, 70년대 들어서는 ‘박춘석 사단’이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백영호, <동백아가씨> 작곡

백영호는 무엇보다 이미자의 대표작인 <동백아가씨>를 작곡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미자로 상징되는 1960년대 ‘트로트’ 가요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박춘석과 함께 쌍벽을 이루었다. 1955년에 발표한 첫 히트곡 <추억의 소야곡>(남인수)과 이후 손인호가 부른 <해운대 엘레지>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불리고 있다.
이미자와 손잡고 <동백아가씨>, <여자의 일생>, <울어라 열풍아>, <황포돛대>, <서울이여 안녕>, <첫눈 내린 거리>, <아씨>, <여로> 등을 발표했다. 남상규 <추풍령>, 문주란 <동숙의 노래>, 남진 <사람 낳고 돈 났지>, 배호 <비 내리는 명동>도 그의 작품이다.

이봉조, 국제가요제 전문 작곡가

뛰어난 색소폰 연주자이기도 했던 이봉조는 트로트가 주류였던 당시 대중음악계에 재즈를 바탕으로 새로운 음악세계를 개척했다는 평을 받는다. 미8군 무대에서 현미를 만나 번안곡 <밤안개>를 주고, 이어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없이> 등 명곡을 안겨준다.
최희준 <맨발의 청춘>, <종점>, <나는 곰이다>, <뜨거운 침묵>, 차중락 <사랑의 종말>, <철없는 아내>, 윤복희 <웃는 얼굴 다정해도>도 그의 대표작이다. 정훈희 <안개>를 비롯한 많은 히트곡도 그의 작품이다.
이봉조는 국제가요제 전문 작곡가로도 유명하다. 1970년 동경가요제에서 <안개>(정훈희)로 3위 입상했는데, 국제가요제에서 한국 최초의 입상이었다. 이후 그리스가요제에 1971년 <너>(정훈희), 1973년 <별>(현미) 참가했다. 칠레가요제에서 1974년 <좋아서 만났지요>(정훈희), 1975년 <무인도>(정훈희ㆍ3위, 최고가수상 수상), 1979년 <꽃밭에서>(정훈희)로 입상했다.

길옥윤, 패티김ㆍ혜은이 음악 파트너

재즈 색소폰 연주자이자 작곡가 길옥윤은 일본에서 활동하다 귀국해 1966년부터 패티김과 예술과 인생의 길을 함께했다. 대한민국 최고 가수 패티김과의 결합은 수많은 아름다운 곡들을 세상에 선물했다.
<사월이 가면>을 시작으로 <구월의 노래>, <빛과 그림자>, <연인의 길>, <별들에게 물어봐>, <하와이 연정>, <람디담디담>, <서울의 찬가>, <사랑하는 마리아>, <사랑하는 당신이>, <사랑이란 두 글자>, <이별>, <사랑이여 다시 한 번>, <사랑은 영원히>를 잇달아 발표했다. 그러나 이들 스타커플은 1972년에 결별하고 만다.
길옥윤이 이혼과 사업 실패로 침체일로를 걷다가 찾아낸 또 다른 빛은 혜은이었다. 길옥윤과 혜은이 콤비는 1976년 <당신은 모르실거야>를 시작으로 <당신만을 사랑해>, <제3한강교>, <진짜 진짜 좋아해>, <새벽비>, <감수광> 등 히트 행진을 이어갔다.


신중현, 한국 록의 대부

‘한국 록 음악의 대부’, ‘한국적 록의 완성’, ‘시대를 앞서간 음악인’. 신중현을 가리키는 말이다. 미8군 연예단에서 음악생활을 시작한 그는 영국의 비틀즈가 활동을 시작하던 1963년 경, 우리나라 최초의 록그룹 ‘에드포(Add 4)’를 결성하고 <빗속의 여인>을 발표한다.
그에 의해 록이라는 서구 대중음악 언어가 이 땅의 목소리로 제련됐고, 가요팬들은 이전과 다른 노래들을 접할 수 있었다.
펄시스터즈에게 1968년 <임아>, <커피 한 잔>. 1969년 <떠나야할 그 사람>, 이정화에게 <봄비>, 김추자에게는 1970년대 중반까지 <늦기 전에>, <임은 먼 곳에>, <거짓말이야>를 선물했다.
이 외에도 임야영 <마른 잎>, 김정미 <간다고 하지 마오>, 장현 <미련>, <석양>을 내놓으면서 히트곡 메이커로 우뚝 선다.
1972년 <아름다운 강산>을 발표하고, 1974년에는 대한민국 최고의 록 음악으로 평가받는 <미인>이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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