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20) 설진영 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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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20) 설진영 지사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11.07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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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과 동전 출신, 창씨개명에 죽음으로 항거
의병활동, 후학 양성, 설진영 서실 건립

 

‘카지야마 토시유키’라는 유명한 일본 소설가가 있다. 총독부에 다니던 아버지 때문에 1930년 한국에서 태어나 1945년 해방 때까지 한국에서 살았다. 그가 쓴 소설 중에 <족보>라는 소설이 있다.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자살한 순창 사람 설진영을 모티브로 한 소설이다. 일본인이 쓴 소설이지만 식민지 시대상과 역사적 사실들을 사실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한국영화계의 거장이자 세계적 영화감독인 임권택 감독이 1978년에 <족보>라는 이 소설을 동명의 영화로 연출했다. 영화는 순창설씨의 족보를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1940년대 일본인 관리 다니(하명중)가 상부의 명령으로 창씨개명을 설득하기 위해 설씨 가문을 찾았다가 종손 진영(주선태)과 딸 옥순(한혜숙)의 자부심에 오히려 동화되는 과정을 그린다. 하명중, 한혜숙, 주선태가 주연을 맡았다. 영화 <족보>는 임권택 감독이 미국영화의 아류에서 벗어나 한국적인 개성을 담아내며 그만의 작품 세계를 정립하기 시작한 기점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이번에 소개할 인물은 소설과 영화 <족보>의 주인공 설진영이다.

금과면 동전리 출생

설진영(薛鎭永, 1869~1940)은 본관이 순창이고, 자는 도홍(道弘), 호는 남파(南坡)이다. 본래 이름은 진창(鎭昌)이었는데 후에 개명하여 진영으로 사용했다. 1869년(고종 6년) 12월 8일, 금과면 동전리에서 아버지인 증 좌승지 상기와 어머니 탐진최씨 사이의 3남 1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금과면 동전리(銅田里)는 1567년 명종 22년 설씨ㆍ박씨ㆍ김씨ㆍ가씨 등 4성이 정착해 시작된 마을이라 한다. 금과면의 명산인 아미산 정기를 타고 굽이굽이 내려와 자리 잡은 모습이 마치 와룡(臥龍) 같고 그 기슭이 꼭 구리 밭 같아 동전리(銅田里)라 부르기 시작한 전형적인 자연마을이다.

의병활동과 후학 양성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민하고 여러 면에서 재주가 뛰어나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아는 재동으로 인근에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그는 학문을 더욱 성취하기 위해 노사 기정진의 손자이자, 유학자요 훗날 호남의 대표적 의병장으로 이름을 날린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의 문하에 들어가 경전은 물론 제자백가의 자집전을 두루 탐구했다.
설진영은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의 우애 또한 두터워 학문과 덕행을 겸비한 선비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의 젊은 시절은 나라의 운명에 먹구름이 일기 시작하던 때였다.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살해되고, 그 시신마저 불살라 버린 일본의 만행과 단발령 시행은 전국에서 의병전쟁이 시작되는 계기가 된다.
이때 설진영은 스승 기우만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투신해 장성, 나주 등지에서 왜적과 싸워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고종으로부터 의병을 해산하라는 명을 받고 의병부대는 해산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1905년에는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06년에 들어서는 기우만 의병장이 일본군에 체포되는 불운이 겹쳤다. 더욱 1910년에는 국권마저 빼앗기게 되니 설진영은 더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고 뒷날을 기약하며 고향으로 돌아왔다.

설진영 서실 건립

스물여섯 젊은 나이에 싸워서 나라를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온 그는 망국의 아픔을 눈물로 달래며 잃은 나라를 다시 찾으려면 무엇보다 인재 양성만이 지름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설진영서실(薛鎭永書室)은 설진영이 1910년에 후학을 양성하고 민족사상을 배양하기 위해서 건립했다. 실제로 이곳에서 많은 인재와 항일 애국지사가 배출되었다. 금과면 동전리 25번지 동전 마을 동쪽 끝자락에 있다.
서실은 앞면 4칸ㆍ옆면 3칸으로 앞ㆍ뒷면 모두 툇마루가 있는 집이다. 왼쪽부터 방과 방, 그리고 대청으로 이어지며 방과 대청 사이는 분합문이 있어 오른쪽 3칸은 필요시 모두 터서 한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동시에 모아 놓고 강의를 할 수 있는 서실에 적합한 구조로 꾸민 것으로 대청 전면에도 분합을 달아 여름에는 걸어 올려 사용했다.
처음에는 초가였으나 현재는 시멘트 기와로 초가였던 지붕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서실 뒤로는 대숲이 있고 마당 오른쪽 한편에는 뒷간이 있는 헛간채를 배치해 놓았다. 1998년 1월 9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96호로 지정되었다.

▲설진영을 주인공으로 제작한 영화 <족보> 포스터.(다음 영화 사진)

 

창씨개명과 절명시

한ㆍ일 민족 차별화에 바탕을 두었던 일제 식민통치는 중일전쟁(1937)을 계기로 그 정책기조가 급변한다. 일제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해 독립의지를 꺾고 전시동원체제에 조선인들을 군인으로 징집하기 위해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1940년 2월부터 조선인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창씨개명(創氏改名)이란 일본식으로 ‘씨(氏)’를 새로 만들고 이름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창씨개명 시행은 조선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의 반발은 거셌다. 조선인이 호응하지 않자 일제는 조선인이 창씨를 안 할 경우, 각종 인ㆍ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교육열이 높은 조선인에게 자녀의 학교 재학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설진영은 어느 날 손자가 다니던 학교로부터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경우 자녀를 퇴학시키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학교에서 돌아온 손자가 울면서 창씨개명을 해달라고 애원하자 그는 할 수 없이 창씨개명을 했다.
설진영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나라가 멸망했을 때 많은 지사(志士)들과 함께 죽지 못했음이 늘 부끄러웠다. 그때 죽지 못하고 30년간 치욕을 받으며 살아왔는데, 이제는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성씨(姓氏)까지도 버리라 하니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 더 살아야만 하는가. 짐승이 되어 사느니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하리라.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아 생각하던 그는 마을 건너편 논 가운데 있는 우물로 가서 몸을 던졌다.
그의 나이 71세 때인 1940년 5월 19일 새벽, 투신한 우물가에는 평소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꽂혀 있었고 거기에는 그의 의관과 절명시(絶命詩) 2절, 한 통의 유서가 얹혀 있었다.

“맹세코 성을 갈지 않으리라
만약 성을 갈고 사당에 참배한다면
조상의 영혼이 얼마나 놀라겠는가
차라리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리라
이어온 전통 나로 끊어 죄인 되어
머리를 두르고 어디로 가랴
저 물에 몸을 던지네.”

‘명현(名賢)은 영남에서 많이 나오고, 충절은 호남에서 많이 나왔다’라는 말이 있듯이 절의의 고장이라 불리는 호남의 순창, 어느 마을을 가더라도 충신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설진영 역시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설진영은 근대 유학자로서 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는 두문불출하며 절의를 지키다 끝내 자결했다. 
설진영은 의병활동 공로 등을 감안해 1991년 뒤늦게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을 추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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