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속시한줄(44) 가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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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속시한줄(44) 가을날
  • 조경훈 시인
  • 승인 2019.11.13 16: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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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그림 : 아원 조경훈 시인ㆍ한국화가, 풍산 안곡 출신

                       가을날

                                         -릴케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 맛이
짙은 포도송이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계속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리하여 낙엽이 구르는 가로수 길을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헤맬 것입니다.

 

1905년 가을 어느 날, 릴케는 조각가 로뎅을 찾아가서 물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삶이냐?”고. 돌덩이를 정으로 쪼아 조각 작품을 만들던 로뎅이 대답했다. “끊임없이 노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늘 시간이 모자랍니다.”
그랬다. 언제나 열심히 일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모자랐다. 그 때 그의 말을 듣고 쓴 시가 바로 이 가을날이다. 마지막 과실이 결실을 맺도록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허락해달라고 기원을 했다.
릴케는 체코에서 태어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면서 노동을 하듯 수많은 산문과 시를 썼다. 주로 아침 일찍 일어나면 지인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사후 그 편지를 모아 셈 해보니 7000통이 넘었다고 했다. 내용은 안부와 더불어 항상 보고 느끼고 고뇌하고 있는 사랑에 대하여, 고독에 대하여, 예술에 대하여, 노동에 대하여, 신과 종교에 대하여 등의 물음과 해답을 끊임없이 써서 지인들에게 보냈고 그 외 시간에는 낙엽처럼 방황하는 자기 신세를 경이로운 생각으로 구도자적인 입장에서 민중에게 다가가는 시를 써서 남겼다.
후세의 사람들은 릴케를 이렇게 평했다. 그의 시는 영원히 산소를 공급하는 영혼의 딸이고, 순금의 영혼을 갈고 또 갈아서 이 시대 모두의 삶을 위하여 순교자적인 고뇌의 시를 잉태시켰다고….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수없이 명멸하고 있는 이 시대의 릴케는 우리의 자존심이며 빛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가을이 가고 있다. 버림받듯 자란 풀꽃들도 작은 씨를 땅 위에 심고 떠나가고 있고 들의 곡식들도 제 할 일을 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내가 맺고자 하는 열매는 아직도 햇볕이 모자란 지 바라보고 모자라면 릴케처럼 기도해야겠다.

※릴케(Rainer Maria Rilke) 1870-1926. 20세기 최대의 독일 시인. 신시집 별전과 말테의 수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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