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21) 신보현 유격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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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21) 신보현 유격대장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11.21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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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맞서 싸운 의병장

 

구한말 순창 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진 의병항쟁의 특징 중 하나는 산악지대 출신 의병장과 의병들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순창의 대표적인 의병장인 양춘영(楊春泳)과 최산흥(崔山興)이 구림, 신보현(申甫鉉)ㆍ김선여(金善汝)ㆍ김상기(金相璣)ㆍ국동완(鞠東完)ㆍ김봉근(金奉根)이 복흥, 김일두(金一斗)가 동계 출신임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는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효율적으로 맞서기 위해 의병들이 익숙한 자연 지형을 이용해 소규모 유격전을 많이 치렀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복흥 출신들이 많은데 복흥의 지리적 위치와 관련이 있다. 복흥면은 북동쪽은 쌍치면, 북서쪽은 정읍 내장산, 남서쪽은 장성 백암산, 남동쪽은 담양 추월산과 접하고 있다. 때문에 복흥은 정읍과 장성ㆍ담양 등 타 지역 의병운동의 영향도 받게 되며, 자연스럽게 의병 활동이 연계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이러한 지리적 요인이 복흥면에서 많은 의병이 배출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순창에서는 특히 1908년~1909년(정미의병) 무렵 많은 의병이 활약했는데, 이 시기 대표적인 의병장이 신보현이다.

출신지ㆍ사망 시기도 ‘추정’

순창이 낳은 대표적인 의병장 중의 하나인 신보현(申甫鉉, 1868~1909년 12월 또는 1910년 사망 추정)은 保玄, 寶鉉으로 한자를 달리 쓰기도 하고, 신창학(申昌學)으로도 불렸다. 1907년부터 의병을 모아서 1909년 12월까지 순창을 중심으로 장성ㆍ담양ㆍ임실ㆍ정읍ㆍ태인ㆍ고부 등지에서 일제에 맞서 유격전을 벌이며 싸운 의병대장이다.
그러나 재판 기록이 없어 그의 가계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다만 활동 지역이나 휘하 의병들 수십 명이 복흥면 출신인 것으로 보아 복흥면 대방리 혹은 칠현리 출신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생 연도는 1868년(고종 5) 쯤으로 본다.
신보현은 의병 50~100명 정도를 거느리고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경찰 보고에 의하면 1909년 4월에는 80명으로 나와 있고, 5월 보고에는 65명, 7월에는 30명, 8월에는 50명, 10월에는 55명으로 되어 있다. 신보현 의병대는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고부정읍 등지에서 활동한 이성화(李成化) 의병대와 연계해 활동하기도 했다.
신보현은 1909년 12월 23일 정읍군 동면 석계촌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휘하 의병들의 재판 기록은 남아있으나, 신보현에 대한 재판 기록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체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09년 12월말 또는 1910년에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자손의 유무도 알 수 없다.

연대별로 살펴본 활동

1908년 봄 장성군 북하면 약수정(藥水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13명과 싸웠다. 또 이 무렵 임실군 강진면 갈담에서도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다.
음력 6월 20일 석양에 신보현은 부하 김만룡(金萬龍) 등을 이끌고 화승총을 휴대하고 복흥면 어은리에 이르렀다. 이장 금방동(金方洞)을 조용한 곳으로 불러내 의병이라 밝히고 식사를 조달해달라며 부하 100명분의 식료를 받아냈다. 마을주민들의 협조를 바탕으로 일본 군경을 상대로 복흥의 산세를 이용해 유격전을 벌였다. 싸움의 전개 과정이나 승패는 알려지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당시 주민들이 의병의 전투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어은리 전투는 정미의병 시기에 해당한다.
11월 26일 하치등면(下置等面, 현재의 쌍치면) 내동에서는 약 200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순창수비대 토벌대와 전투를 벌였다. 이때 신보현 의진은 이 진사(進士)와 정해석(鄭海石) 등의 의병장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약 150명이 총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1909년 2월 15일경 복흥면 화개산에 거주하는 신보현과 의병장 유종여(柳琮汝)가 백양사  운문암에서 회합했다.
3월 3일 태인 순사 주재소의 보고에 의하면 신보현은 의병장 이성화(李成化), 노삼문(盧三文) 등과 연계하여 중국인으로부터 총기 300정 매입 계약을 했다고 한다.
4월 5일 새벽 1시경 이성화 의진과 합세하여 부하 약 100명을 이끌고 순창군 가포곡(加布谷) 일대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이때 적에게 타격을 주기도 했지만, 의병 30명이 사망했으며 총 8정도 빼앗겼다.
5월 1일에는 태인군 인곡면에서, 5월 19일에는 고부군 벌말면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6월 7일 전라북도 흥덕(현 고창군) 주둔 기병 산구(山口) 특무 조장이 근무지 부임을 위해 오전 9시 고부읍을 출발하여 10시를 지나 서부면 강고리 부근에 이르고 있었다. 근처에 있던 신보현 의병부대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지만 19명이 사망했고 4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9월 26일 부장(部將) 김진화(金振化)가 체포되었다. 여러 차례 큰 타격을 입었지만, 1909년 11월 이후에도 순창ㆍ정읍 일원에서 일본 군경을 상대로 치열하게 유격전을 전개했다.

용맹했던 복흥 출신 의병들

신보현 의진에서 활약했던 의병들은 대부분이 복흥면 출신이다. 신보현과 함께 구국의 횃불을 높이 들고 항전한 대표적인 항일투사들로는 김선여, 백동녕, 이창용 등이 있다.
김선여(金善汝, 1875~1910)는 복흥면 서마리 웃마제(상마치) 출신이다. 농업에 종사하다가 1908년 3월 신보현 의병장 휘하에서 선봉장이 되어 1909년 2월경까지 의병을 이끌고 순창ㆍ정읍ㆍ태인ㆍ장성 등 곳곳에서 작전을 전개했다. 1909년 3월에는 신보현 의진에서 독립해 복흥면 백방산에서 의병 40여명을 규합하여 의진을 편성하고 의병장이 되었다. 이후 11월까지 순창과 담양ㆍ장성 등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다. 특히 그는 일본군과의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도 의병대열에서 이탈하여 민폐를 끼친 자들을 응징함으로써 의병운동의 대의를 지켜갔다. 그러다가 피체되어 1910년 4월 21일 대구 공소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아 집행되었다.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백동녕 의병은 신보현 대장 휘하에서 천보대장으로 활약했는데 힘이 장사였다. 복흥면 농암리 삼치장 주막집에서 일본 순사의 멱살을 잡아 끌고 가다가 길가에 내던지니 그 순사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회자하는 대단한 괴력의 소유자였다.
이창용 의병은 1909년 2월 혼인하고 3월에 신보현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순창ㆍ담양ㆍ장성ㆍ정읍 등에서 전투에 참여하다 8월 30일 복흥면 백방산 전투에서 22세 나이로 전사했다.
전라북도 향토문화연구회에서 편찬된 《전북의병사》에는 신보현 부대 의병의 인원과 활동 내역이 정리되어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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