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분다(16)/ 망각
상태바
바람이분다(16)/ 망각
  • 선산곡
  • 승인 2019.11.21 17: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르토르 피아졸라의 <망각 Oblivion>.

<엔리코 4세> 영화음악이다. 엔리코는 하인리히를 이탈리아식으로 발음한 것을 뜻한다. 교황과 황제의 다툼으로 유명한 ‘카놋사의 굴욕’의 주인공. 이탈리아 노벨문학상을 받은 극작가 루이지 피란델로의 희곡 <엔리코 4세>를 마르코 벨로치오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엔리코 4세의 전기가 아닌 자기를 엔리코라고 믿는 현대의 치매 환자 이야기라고 한다. 영화는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애초에 들은 적도 없었다. 인터넷을 뒤져도 얻은 것은 겨우 포스터 한 장. <해바라기>의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와 <부베의 연인>에 나오는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의 이름이 있어 반가웠지만, 피아졸라가 그 영화를 위해 작곡한 곡이 <망각>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피아졸라가 이 <망각>과 더불어 탱고라는 음악을 한단계 더 높은 예술로 끌어올린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직접 연주한 버전은 3가지다. 반도네온, 비올라, 피아노. 그러나 다른 유명 아티스트들이 연주한 버전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첼로, 바이올린, 트럼펫, 기타, 하모니카 등등 노트에 적어놓고 그 수를 셀 정도다. 그중 반도네온의 버전이 가장 좋은 이유는 피아졸라가 그 악기연주에 특히 뛰어나기 때문이다.
망각은 세월을 딛는다. 보통 사람들은 겪는 일들은 천천히 그 세월에 묻혀 잊어가며 살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작 잊어야 할 일들이 잊히지 않는 것이 문제다. 그야말로 공자님 말씀대로 잊으려 하나 잊기 어렵고 생각지 않으려 하나 절로 생각나는 (欲忘而難忘 不思而自思) 것들. 그래도 필경은 잊히겠지. 세월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다는 아닌 것 같다. 망각보다 더 무서운 게 치매(癡呆)가 있다.
배우 윤정희가 치매에 걸렸다는 것도 마음 아프지만, 백건우의 집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이 더 아팠다. 건너야 할 강도 많지만, 그 강 앞에서 인생의 길이 뒤집힐 일은 없다. 윤정희는 그것을 모르고 있고 백건우는 그것을 알고 있는 것뿐이다.

가을이 간다. 작년까지 도심의 복판에 서 있었던 나무들이 어느 순간 철거되었다. 늘어나는 교통량을 대비한 도시계획 때문인 것 같았지만 내게는 너무 아쉬운 장소 하나가 사라져버렸다.
작년에 그곳에 있었던 벤치에 자주 앉아있었다. 친구의 사무실 근처였다. 벤치 앞 느티나무 사이에 플래카드가 눈높이로 걸려있어 지나가는 차도 사람도 가려지는 곳이었다. 그 낡은 벤치에 앉아 내가 했던 것은 마음을 지우는 일이었다. 치매를 그렇게 부르자는 글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지만, 마음을 지우기 정말 좋은 장소였다.
“이 도심에서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자리가 없어졌어.”
친구에게 내가 한 말이었다. 망각할 수 없는 슬픔에 지쳐 숨었던 자리. 내 망각을 위해 망각의 자리를 없애준 것일까. 그날은 오겠지. 세월을 믿어볼 수밖에 없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순창 농부]순창군창업유통연구회 변수기 회장, 임하수 총무
  • 고창인 조합장 징역 2년 구형
  • 최순삼 순창여중 교장 정년퇴임
  • 순창읍 관북2마을 주민들 티비엔 '웰컴투 불로촌' 촬영
  • 선거구 획정안 확정 남원·순창·임실·장수
  • 순창시니어클럽 이호 관장 “노인 일자리 발굴 적극 노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