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현대사(13) 1970년 대중가요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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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현대사(13) 1970년 대중가요②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11.29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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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와 함께 살펴본 20세기 후반의 한국사회(13)

1970년대 한국 대중음악을 이끈 포크송은 김민기 등 몇몇 가수의 노래를 제외하면, 이들이 영향받았던 미국 모던포크 운동의 노래처럼 사회 비판적인 특성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부른 노래는 분명 상업적인 대중가요였다.
그런데도 대중들은 포크송을 비상업적이고 순수한 음악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70년대 초반의 포크송이 몇 가지 점에서 이전 노래와 달랐기 때문이다.
이들 포크송은 대학가와 젊은이들의 음악감상실에서 출발해 라디오를 거쳐 텔레비전으로 진입했고, 관현악 반주를 거부하고 가수 스스로 통기타(어쿠스틱 기타)를 반주하는 연주 방식을 택했다. 자작곡 가수들도 본격적으로 등장해 당시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생각과 정서를 대변할 수 있었다. 평상복 차림으로 무대에 올라 또래 젊은이들과 일체감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는 1960년대 대중가요계의 여러 관행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가사에서도 ‘하얗다ㆍ맑다ㆍ가난하다ㆍ작다ㆍ모르다’ 등의 어휘를 집중적으로 사용하며 물질적 가치를 추구해온 기성세대와 달리 순수성과 정신 지향적 가치관을 드러냈다.

▲뚜아에무아 1집 앨범.
▲뚜아에무아 1집 앨범.

포크 혼성듀엣 ‘뚜아에무아’

이필원(남)과 박인희(여)로 구성된 ‘뚜아에무아’(Toi Et Moi)란 팀명은 프랑스어로 ‘너와 나’라는 뜻이다. 당시 이필원은 록밴드 ‘타이거스’에서 리더로 활동하고 있었고, 박인희는 숙명여대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미도파 음악 살롱에서 사회(MC)를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미도파살롱에서 비틀즈의 <렛잇비(Let It Be)>를 함께 부른 것이 인연이 되어 1970년 3월 ‘뚜아에무아’를 결성하고, 5월에 1집 음반을 발매한다.
1집 음반에는 <스카보로의 추억>ㆍ<썸머와인>ㆍ<도나도나>ㆍ<제네파 주네파> 등 번안곡이 다수였지만 이필원이 작사ㆍ작곡한 <약속>이라는 창작곡이 담겨 있다. 당시 한국 통기타음악에서 창작곡이 수록된 최초의 음반이었다. 2집에서는 박인희가 작사ㆍ작곡한 <그리운 사람끼리>를 발표한다. 번안곡이 대부분이던 그 시절 두 사람은 작사와 작곡을 할 수 있었던 싱어송라이터(가수 겸 작곡가)이자, 국내 본격적인 포크 혼성듀엣으로 우리 가요사에 중요한 획을 그었다.
애상적이고 우수에 젖은 이필원의 음색과 청아하고 차분한 박인희의 음색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젊은이들의 가슴을 흠뻑 적셨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2, 3집 음반이 연이어 출시되었고 풋풋하고 고운 그들의 음악은 지금까지도 전설적 화음으로 평가받고 있다.
1970년 뚜아에무아를 결성할 당시 이필원은 24세였고 박인희는 23세였다. 이필원은 데뷔 당시 기혼자임을 밝혔고 박인희와는 먼 친척 사이라고 연막을 쳤지만, 이들이 풍기는 분위기는 누가 봐도 연인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부르는 노래마다 연인 간의 사랑을 속삭이는 노래였으니 팬들의 로망에 불을 지필만 했다. 중ㆍ고등학교도 남녀 학교로 확연히 구별되고, 공공장소에서 연인 간에 손도 제대로 잡지 못했던 시절, 멋진 남녀 가수가 공개적으로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듯한 노래를 부르고 연인처럼 보인 것이 자유로운 연애를 원했던 당시 젊은이들의 대리만족이었던 같다.
한국 대중가요에서 남녀 혼성듀엣은 1969년 초 컨트리음악을 하던 서수남과 현혜정이 ‘서수남 현혜정’이라는 팀명으로 <정말로 너무해> 등을 발표한 것이 최초이다. 이후 뚜아에무아를 거쳐 라나에로스포ㆍ블루진ㆍ바블껌ㆍ원프러스원 등으로 이어지면서 한국 통기타음악의 발전은 남성 듀엣을 넘어서 남녀 혼성듀엣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가속화되며 ‘70년대식 연가’를 탄생시켰다. 뚜아에무아는 1971년 11월에 해체된다. 이필원은 1973년 이후 한인경을 맞아 뚜아에무아 2기 활동을 잠시 이어갔다.

외국곡 카피를 중시했던 시대와 <애원>

수많은 록밴드(그룹사운드)가 활동했던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 당시만 해도 창작곡보다 외국곡을 얼마나 똑같이 연주하고 노래하는가로 록밴드의 우열을 가렸다. 최초로 창작곡을 발표했던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조차 처음엔 관심을 끌지 못했고 무시당하는 일이 허다했다.
록밴드 쉐그린 등에서 리더 겸 보컬로 활동했던 황규현을 찾아온 작곡가 박진하는 “생명력 있는 가수가 되려면 외국곡이 아닌 자신의 노래를 불러야 된다”며 <애원>의 악보를 건넸다. 처음에 황규현은 “폼 나는 외국곡도 아닌 촌스러운 가요를 왜 부르냐”며 거부했다. 하지만 계속된 간청에 밴드 쉐그린과 함께 미도파살롱 무대에서 시험 삼아 불러보았다. 곧 <애원>을 신청하는 사람들이 급속히 늘어갔다.
1970년 1월 황규현의 데뷔음반이 발매됐다. 서울 종로와 명동의 음악다방, 대학가에는 <애원>을 수록한 황규현의 음반이 필수 소장품이 될 만큼 신청곡이 밀려들었다. 1980년대까지 중ㆍ고생들이 <애원>의 가사 “목이 메여 불러보는 내 마음을 아시나요”를 “목이 메여 불러본다. 지금은 연습이다”로 장난스럽게 개사해 불렀을 만큼 이 곡은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소양강 처녀) 앨범.
▲(소양강 처녀) 앨범.

 

국민 애창곡 <소양강 처녀>

<소양강 처녀>는 작사가 반야월이 소양강댐 공사가 한창이던 무렵, 해 질 녘 소양강의 아름다운 풍경에 떠나간 임을 그리는 소양강 처녀의 애절한 마음을 녹여 노랫말에 담았다. 이후 이호가 멜로디를 붙이고, 신인 가수 김태희가 불렀다. 애절한 내용을 담았지만 약간 빠른 박자의 멜로디를 지닌 이 노래는 발매되자마자 10만 장이 넘는 판매기록을 세웠다. 김태희는 이 노래로 반짝 스타 반열에 올랐지만, 후속작을 이어가진 못했다.
그런데 왕년의 유행가 <소양강 처녀>는 세월이 한참 지난 1991년 이후 전 국민의 여흥 공간인 노래방 붐을 타고 최고의 국민 애창곡으로 주목받는다. 그러자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던 김태희도 오랜만에 지상파 티브이(TV)에 복귀해 신곡 앨범까지 발매했다.
<소양강 처녀>는 많은 가수가 리메이크했고, 1992년에는 한서경이 랩댄스 스타일로 리메이크해 젊은 세대에게 크게 인기를 끌었다. 노래하기 편한 선율과 누구나 공감하는 애절한 가사 때문일까? <소양강 처녀>는 1993년 대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요 1위로 선정되기도 했고, 1996년에는 조선족 동포들의 애창곡 1위로 선정되는 등 국민 애창곡으로 지금도 사랑받고 있다.

일일연속극 <아씨>

1970년, 사람들은 매일 밤 9시 40분이면 티브이(TV) 앞에 모였다. 바로 3월부터 약 10개월 동안 방송된 동양방송(TBC) 텔레비전 일일연속극 <아씨>를 보기 위해서였다.
드라마는 1930년대부터 1950년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해, 자기희생을 미덕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한국적인 여인상을 그렸다. 동양방송은 서울, 부산 등 대도시 지역에서만 시청 가능했고, 호남지역에서는 시청할 수 없었던 제약이 있었으나 <아씨>의 열풍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방송 전에 “문단속을 잘해 도둑을 조심하고 수도꼭지가 잠겨 있는지 한번 점검한 뒤에 프로그램을 시청해 달라”는 서울시경의 안내 문구가 표시된 것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자가 부른 주제가도 크게 인기를 끌었다. <아씨>의 성공을 계기로 다른 방송국에서도 일일연속극을 다투어 신설하며, 일일극 홍수시대를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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