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22) 국동완, 유격전과 변장술의 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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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22) 국동완, 유격전과 변장술의 귀재’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12.05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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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흥에서 성장
▲국동완 의병장이 성장한 복흥면 자포리 전경.
▲국동완 의병장이 성장한 복흥면 자포리 전경.

 

국동완(鞠東完, 1867∼1909)은 본관은 담양이며 자는 찬서(贊書)이다. 1867년(고종 4) 2월 17일 전남 장성군 장서읍 안평리의 속칭 두름바위라는 곳에서 국만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장성에서 태어나긴 했으나 5세 때 아버지를 따라 복흥면 반월리 자포마을로 이사하여 성장한 순창사람이라 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기개와 호방한 성품을 지녀, 마을 또래들과 어울릴 때면 진 놀이를 좋아했다고 하며 혹 누가 장래의 희망을 물으면 서슴없이 장차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충신이 되겠다고 했다 한다.

을미의병 때 첫 의병활동

국동완이 성장한 시기는 1866년의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등을 겪으면서 이 땅에 발을 들여놓은 열강들의 각축장이 된 가운데서 몸부림치고 있는 시기였다.
1905년 11월, 실질적으로 국권을 빼앗아 가는 을사늑약이 맺어졌다. 치욕스러운 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전국 곳곳에서는 일본을 몰아내고 매국 원흉을 내쳐 국권을 회복하자는 외침 소리가 불길처럼 번졌다.
을미의병 기간 순창을 비롯한 호남지역에서는 의병항쟁이 다른 지역에 비해 저조했다. 그것은 1년 전의 동학농민혁명(갑오농민전쟁)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겪은 피해가 너무 엄청나서 이 지역 민중과 유림은 대부분 위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국동완은 분연히 일어나 구국 투쟁의 길에 나선다. 이 땅에 침입한 일본을 내모는 길만이 나라를 구하는 길임을 생각한 것이다. 그의 의병활동은 《전북의병사》와 <독립유공자 공훈록> 등에 기록되어 있다. 29세 때인 1896년 을미의병 때 전남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평리원(조선 말의 관청으로 고등재판소를 개칭한 기관)에 수용됐다. 그러나 수감 중 탈출하여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독자적으로 소규모의 의병대를 조직하여 그들을 이끌며 활동했다.

기삼연 의병부대에서 활약

국동완은 1907년부터 우국지사 49여명을 규합하여 왜적과의 투쟁에 나섰다. 그는 활동하는 동안 동완이라는 이름 외에 차서, 치원, 호남 등의 이름으로도 불렸다. 그의 이름이 이처럼 여럿인 것은 항상 자신을 숨기고 비밀리 투쟁하는 데 필요했기 때문이다.
국동완은 정미의병(丁未義兵) 항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될 때 기삼연(奇參衍, 기정진의 조카) 의진의 전기홍(全其泓) 의병장 휘하에서 후군장(后軍將)으로 활약하면서도 거의 독자적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했다.
국동완이 후군장으로 활약한 전기홍 의병대는 인근에서 모병한 농민과 포수들로 구성되었다. 전술은 게릴라전이었으며, 화승총을 기본 화기로 하고, 천보총ㆍ신식총을 사용했다. 화기와 탄환은 자체에서, 또는 인근 마을주민 중 기술자에게 의뢰해 생산하거나 일본군과 교전한 뒤 노획했다. 식량ㆍ의복 등은 산에서 채취하거나 사냥으로 조달하기도 했지만, 인근 마을주민들로부터 자진해서 받았고, 필요시에는 각 마을에 배정해 마을의 부호들로부터 징발했다고 한다.
같은 해 이석용(임실 출신)과 함께 ‘창의동맹단’을 조직해 남원ㆍ임실 등지에서 왜적과 싸웠다.

정미의병 때 맹활약

1908년 1월, 전남 장성군 황룡면 탐정리에서 국동완은 왜적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국동완 의진은 왜적 10여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사기가 높아진 대원을 이끈 그는 2월 19일 전남 광산군 비아면 비아리에서 다시 왜적과 맞서 하루 동안 접전을 벌이면서 5명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비아전투 이후 3월 7일부터 그는 이름을 호남이라 바꾸어 부르며 의병 30여명을 이끌고 흥덕군(지금의 고창군 흥덕면) 후포리에 있는 일본인의 집을 습격하여 그곳에 있던 왜병 2명을 사살하고, 일화 200원과 엽전 100냥을 몰수하여 군자금으로 쓰면서 활동했다.
이어 3월 13일에는 고부군 소성면 전투에서, 같은 달 18일에는 고부군 서부면 중리에서 일본인 경찰과 접전을 벌여 적 여러 명을 사살하고 총포와 화약 등 많은 전리품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4월 9일 이후에는 고창군 방장산, 무장군 선운사, 흥덕군 입헌촌, 부안군 입하면과 하서면 등 10여 곳을 이동하면서 왜군을 찾아 괴롭히고 전투를 벌여 사살한 적만 해도 20여명이 넘었다.

유격전과 변장술의 귀재

이즈음 국동완 부대는 총기 20여정을 휴대하고 40여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유격부대였다. 뛰어난 기동성으로 부안ㆍ고부ㆍ흥덕 등 지역을 휩쓸었다. 이들은 대체로 등짐장수, 상인 등 신분이 비교적 낮은 계층의 인물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정미의병을 전후한 시기에 의병운동의 대중화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그는 이처럼 적은 수의 의병대를 이끌면서 적의 허를 찌르는 전법으로 왜적을 놀라게 하고 또 큰 피해를 주며 종횡무진으로 활동해 나갔다.
그는 40여명으로 조직된 부대를 이끌고 신속하게 움직여 왜적이 예측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본 경찰이나 헌병이 주둔하는 곳을 찾아다니며 불시에 기습했다. 때로는 적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여 피해를 주는 등 실로 다양한 전략 전술을 펼쳤다.
그는 변장술에도 능했다고 한다. 어떤 때는 괭이나 삽을 둘러맨 농민으로 변장하여 왜적이 있는 곳에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가사를 입은 중으로,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선비로 변장해 가면서 왜적의 눈을 속이며 투쟁을 전개했다.
1908년 4월 29일(음), 봇짐 장사하던 문판석(文判石)이 부하로 가담해 국동완 의진의 이동과 군수품을 조달하는데 협력했다. 이날 이후에는 이름을 치원이라 쓰면서 부안, 고부, 흥덕 등지에서 활동했다. 5월 30일. 박춘집(朴春楫), 최동이(崔東伊) 등 부하 8명을 등짐장수로 가장하고 인솔하여 고부군 거마면 평교리에 사는 일본인 대삼오랑(大森五郞)의 집을 습격하여 총 6정, 칼 1자루,  탄약 70발을 탈취하여 군수품으로 사용했다. 이날 이후로는 다시 이름을 호남으로 바꾸어 사용했다.

좌절된 꿈 … 순국

1909년 9월 6일. 고창군 고창읍 동남 10여리 쯤 금곡에서 국동완은 의병 40여명과 함께 일본 보병 제1연대에 포위되어 체포당했다. 구금된 그는 악명 높은 헌병대의 견디기 힘든 고문을 받으며 지내야 했다.
당시 적들의 요구는 다른 의병들의 행방과 인적사항을 밝히라는 것이었다. 모진 고문과 협박 속에서도 굳게 다문 입을 끝내 열지 않고 버티다가 전남 영광 헌병대로 이송되었다. 1909년 10월 10일 헌병대에 의해 총살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42세. 그의 묘는 복흥면 반월리 자포마을 건너 별뫼마을에 있으며, 1980년 대통령 표창,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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