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현대사(14) 배호 떠나고 남진ㆍ나훈아 경쟁한 19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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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현대사(14) 배호 떠나고 남진ㆍ나훈아 경쟁한 1971년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12.12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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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과 함께 살펴본 한국사회(14)

4월 27일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약 90만 표 차이로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후일 중앙정보부 관계자나 전문가들은 부정선거가 없었다면,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김대중이 오히려 100만 표 차이로 앞섰을 것이라 분석하기도 했다. 김대중은 선거에 이기고 개표에서 진 것이다. 이후 김대중은 그를 두려워한 박정희와 영남 패권주의자들의 30년 가까이 집중 탄압 대상이 되며 고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8월에는 경기도 광주군에서 엉터리 주거대책에 격분한 주민들에 의해 ‘광주(현 성남시) 대단지사건’이 일어났다. 뒤이어 북한 침투 작전을 위해 훈련받던 부대원들이 일으킨 ‘실미도사건’이 일어났다. 12월 25일에는 서울 대연각호텔에서 화재가 발생해 대규모 인명피해가 생겼다.


1971년 인기가요

배호가 <마지막 잎새>와 <영시의 이별>을 남기고 팬들의 곁을 떠났고, 남진은 월남에서 돌아와 <마음이 약해서> 등을 발표하며 나훈아와의 경쟁자 시대를 준비한다. 나훈아는 <가지 마오>ㆍ<풋사랑>ㆍ<머나먼 고향>을 발표하며 만반의 태세를 갖춘다.
<거짓말이야>(김추자), <참사랑>(김상희), <사랑이 미움 되면>(정훈희), <진정 난 몰랐네>(임희숙), <보리밭>(문정선), <벽오동>(투코리언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박건) 등의 노래가 크게 유행했다. <아침 이슬>(김민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ㆍ<세노야>(양희은), <사랑해>(라나에로스포), <꽃반지 끼고>(은희) 등의 창작 포크송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멋진 번안곡도 많이 소개됐다. <꿈속의 나오미>ㆍ<마음은 짚시>(김추자), <러브스토리>ㆍ<스잔나>(정훈희), <춤추는 첫사랑>(이현), <팔도유람>(서수남과 하청일), <아름다운 사람>(서유석) 등. 트로트 계열 노래는 <물새 한 마리>ㆍ<잘했군 잘했어>(하춘화), <선생님>ㆍ<먼데서 오신 손님>(조미미), <기적 소리만>(배성), <세월이 약이겠지요>(송대관) 등이 있었다.

남진ㆍ나훈아, 라이벌시대 개막

월남전에 파병됐던 남진이 4월에 귀국했다. 잠시 준비를 끝낸 그는 9월 서울시민회관 ‘남진 귀국 리사이틀’을 시작으로 가요계에 복귀한다. 남진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혜성처럼 나타난 나훈아는 가요계를 주도하며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드디어 대한민국을 ‘아수라장’으로 몰고 가는 남진과 나훈아, 한국대중음악사상 최초의 라이벌시대가 개막된다.
두 사람의 대결에는 모든 세대와 계층, 즉 모든 국민이 참여했다. 할아버지부터 학생들까지, 직장과 모임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집안 식구들마저도 남진 편, 나훈아 편으로 나뉘어 신경전을 벌였다. 꼬마들까지도 어른들에게서 “넌 남진이냐, 나훈아냐?”라는 선택을 강요받았을 정도였다. 남진과 나훈아, 내편과 네편으로 나라가 두 동강 난 듯했다. 당시 연예계의 흐름을 주도한 주간지들은 두 가수를 비교하는 특집기사로 온통 도배되었다.
두 가수는 모든 것이 대조적이었다. 부잣집 도련님 같은 외모의 남진은 당대 영화배우들도 부러워한 세련된 꽃미남이었고, 나훈아는 야성적이고 토속적 느낌을 주었다. 출신 지역도 남진은 전라도 목포, 나훈아는 경상도 부산이다.
맞수답게 두 가수의 노래는 접근법과 색깔도 달랐다. 당시 남진은 <임과 함께>ㆍ<젊은 초원>ㆍ<그대여 변치 마오>ㆍ<나에게 애인이 있다면> 등 대체로 빠른 박자(템포)의 노래를 흥겨운 춤과 함께 선사했다. 나훈아는 <물레방아 도는데>ㆍ<고향역>ㆍ<머나먼 고향>ㆍ<강촌에 살고 싶네> 등 향수를 자극하는 노래가 많았다. 아기자기한 남녀의 사랑을 경쾌하게 노래한 남진은 경제성장의 화려한 장면을 대변했고, 주로 농촌을 떠난 사람들의 비통함을 다룬 나훈아의 노래는 산업사회 이면의 아픔을 담아냈다.
두 가수의 라이벌전은 대중음악 음반 시장이 활성화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고, 앞으로는 재현하기 어려운 트로트의 마지막 찬란한 전성기를 일궈 냈다.

‘10대가수 청백전’ 첫 대결 남진 승리

1971년 문화방송(mbc) 10대가수 청백전, 남자 가수에 남진ㆍ나훈아ㆍ최희준ㆍ이상열ㆍ김상진, 여자가수에 이미자ㆍ김상희ㆍ펄시스터즈ㆍ조미미ㆍ하춘화가 선정됐다. 신인상에는 이용복(남)과 은희(여)가 뽑혔다.
이날 초미의 관심사는 누가 최고인기가수상(가수왕)을 차지하느냐였다. 남자가수 순서 네 번째로 등장한 나훈아는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가지 마오>를 부르면서 박자를 놓치는 실수를 하게 된다. 마지막에 등장한 남진은 신곡 <마음이 약해서>와 <미워도 다시한번>에 이어 빠른 템포의 <마음이 고와야지>를 부르는데 이 작전이 주효한다. 당시 우편 투표와 현장 박수 소리 크기를 합산했는데, 공연 현장에서 많은 박수와 환호성을 끌어낸 남진이 나훈아를 누르고 가수왕을 차지한다. 라이벌 대결 1차전은 남진이 승리했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 나훈아는 기성세대의 사랑을 장악하면서 남진보다 더 중량감 있는 가요계 레전드(전설)로 상승했다. 하지만 70년대 중반까지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라이벌전의 승자는 엄연히 남진이었다. 라이벌전이 극도에 달했던 시절, 문화방송(MBC)ㆍ동양방송(TBC)ㆍ한국방송(KBS)의 최고 인기가수상은 대부분 남진이 수상했다. 문화방송 10대가수청백전도 1971년부터 1973년까지 3년 연속 남진이 나훈아를 누르고 가수왕을 차지한다. 심지어 남진이 군에 입대해 공백기를 맞은 때에도 인기조사를 하면 항상 남진이 1위, 나훈아가 2위였다.

촛불처럼 자신 불태운, 불멸가객 ‘배호’

1971년 11월 7일, 신장염으로 사투를 반복했던 배호가 영원히 안녕을 고했다. 공교롭게도 그의 1963년 첫 취입곡은 <굿바이>였고, 1971년 마지막 취입곡은 <마지막 잎새>와 <0시의 이별>이었다. 발표곡 중 <안녕>ㆍ<파란 낙엽>ㆍ<또 하나의 이별> 등의 단어들이 암시하듯 배호는 활동기간 내내, 일찍 닥쳐올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배호는 1967년에 발표한 <돌아가는 삼각지> 히트 이후 <안개 낀 장충단공원>, 68년에는 <누가 울어>ㆍ<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랑>ㆍ<안녕>으로 인기 절정에 오른다. 69년 이후에도 <당신>ㆍ<만나면 괴로워>ㆍ<비 내리는 명동> 등을 히트시킨다.
배호의 본격적인 가수 활동은 병마(신장염)와 함께 시작되었다. 사회자 등에 업혀 노래하거나 무대에서 피를 토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히트곡을 투병 중 녹음했다. 배호는 투병과 호전 상황에 따라 때로는 끊어질 듯 탄식에 가깝게, 때로는 비교적 건강한 음색으로 여러 가지 창법을 구사했다. 녹음 때나 공연 때나 언제나 거의 똑같이 노래하던 이미자에 비해 노래할 때마다 항상 다르게 노래할 수밖에 없었던 배호.
배호가 위대한 가수로 추앙받는 이유는 뛰어난 가창력 때문만은 아니다. 8년 동안 점심을 먹어본 기억이 없다는 자신의 말처럼 그는 가난ㆍ질병과 싸움을 이겨낸 인간 승리의 표본이었다. 그리고 무대에서 노래하다 죽겠다는 순교자적 정신을 보여준 진정한 가객(歌客)이었다. 그는 자신이 체험한 극심한 고통과 슬픔을 애가(哀歌)에 녹여 산업화의 그늘에 소외돼 있던 서민들과 도시의 가슴 아픈 이들을 위로했다.
그래서일까? 2000년 최초로 가수의 이름을 딴 ‘배호길(路)’이 서울 삼각지 이면도로에 생겼고 노래비가 전국에 세워졌다.
인터넷엔 그의 팬클럽이 40개가 넘는다. 떠난 지 50년이 다 되지만 배호를 기리는 열기는 식을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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