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쓰기 판결문… 5·16 이후 시행
상태바
가로쓰기 판결문… 5·16 이후 시행
  • 림양호 편집인
  • 승인 2011.07.14 13: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글 전용, 가로쓰기와 띄어쓰기 적용…변호사회 한때 반발

가장 오래된 판결문은 ‘동학당’ 사건

현재 남아 있는 판결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대한제국시대인 1895년 5월 4일에 나온 ‘고등재판소 판결선고서’이다. 이 ‘고등재판소 판결선고서’는 동학농민운동과 관련된 것이다. 충청도 청풍읍의 평민 황거복 등이 동학당(東學黨)에 들어가 지방의 안녕을 해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범죄가 입증되지 않아 무죄 방면(석방)한다”는 결론이 적혀 있다. 이 판결문에는 사건번호와 피고인의 주소ㆍ성명이 있고, 마지막 부분에 선고일자와 재판을 맡은 참의(현재의 국장급)와 주사의 이름이 적혀 있다. 한지에 붓으로 작성한 판결문은 대부분 한자에 토씨만 한글로 썼다.
두 번째로 오래된 형사 판결문은 같은 해 5월 22일 한성재판소에서 나온 것이다. 내용은 ‘상인인 피고인이 술에 취해 순검(현재의 경찰관)을 상해한 사건에서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하고 장형 60대에 처한다’라고 적혀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어로 작성된 판결문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판결문도 일본어로 채워졌다. 일제는 1912년 ‘조선민사령’과 ‘조선형사령’을 공포해 일본 민사소송법과 형사소송법을 의용하게 했다. 의용 민사소송법은 판결문에 넣어야 할 사항으로 주문, 사실 및 쟁점, 이유, 당사자 및 법정대리인, 재판소 등을 명시하도록 했다. 의용 형사소송법도 판결 이유를 제시하고, 유죄판결의 경우엔 사실 및 증거, 적용할 법령 등을 적도록 했다.
5ㆍ16후 한글 가로쓰기로 바꿔 신속 처리

해방 후에도 판결문 형식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한자와 한글을 섞어서 띄어쓰기 없이 세로쓰기로 작성했다. 판사의 판결 초고를 서기가 먹지를 대고 베껴서 판결서를 만들었다. 이 판결서에 판사가 서명날인을 하면 판결문 원본이 되고 먹지를 대고 쓴 것은 재판 당사자들에게 보내기 위해서였다. 먹지를 이용한 방식은 판사들이 컴퓨터로 판결문 원본을 직접 작성하기 시작한 1990년대까지 이어졌다.
가로쓰기 판결문이 등장한 것은 1961년 5·16 직후다. 사건 수가 급증하던 당시 상황에서 한자ㆍ한글 혼용과 세로쓰기는 신속한 사건 처리를 막는 걸림돌로 떠올랐다. 더구나 당시의 사무기기인 타자기를 사용할 수도 없었다.
1961년 말 조진만 대법원장은 정부 방침에 따라 법원의 모든 문서를 한글로 쓰고, 가로쓰기와 띄어쓰기를 하도록 하는 법원 규칙을 시행했다. 이에 대해 변호사협회에서는 판결문 등에 한글 전용을 하게 되면 의미를 오해해 국민 생명과 재산에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거세게 반발했다. 그러나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는 큰 무리 없이 뿌리내려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90년대부터 법원전산시스템으로 발전

판사들에게 개인용 컴퓨터를 보급한 것은 1990년대 초반부터이다. 이때부터 사건 처리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다. 판사가 판결문 원본을 직접 작성함에 따라 판결 주문이 선고 전에 유출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없어졌다. 초기 글꼴은 ‘신명조’였다가 ‘휴먼명조’를 거쳐 법원에서 개발한 ‘판결서체’로 바뀌었다. ‘글자 크기 12포인트에 줄 간격 250%’는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또 판결문에 표를 넣고 엑셀 프로그램을 이용해 손해배상액 계산식을 삽입하는 등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1997년엔 서울지방법원 판사들이 컴퓨터로 판결문을 작성하는 방법 등을 담은 ‘판사가 컴퓨터를 만났을 때’라는 책자를 펴내기도 했다. 그 후 법원전산시스템이 정비되면서 판결문도 이 시스템을 활용해 작성하고 있다. 판사들은 전산시스템에 저장된 전국 법원의 판결문들을 손쉽게 열람해 재판에 참고하고 있다.

용어는 알기 쉬운 우리말로, 문장은 짧게

판결문을 읽어보면 어려운 법률용어가 많이 나와 무슨 뜻인지 모를 때가 많다. 그 때문에 법률용어를 알기 쉬운 우리말로 고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정부 안의 법제처는 법률을 개정할 때마다 어려운 한자말을 쉬운 우리말로 바꿔왔다. 법원도 판결문에 쓰는 용어를 우리말로 바꿔오고 있다. 판결문에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였던 ‘각(각 피고들은, 각 비율로, 각 매매를)’과 ‘동(동년 동월 동시, 동인은, 동녀를)’의 사용도 자제하도록 했다.
아울러 그동안 문제점으로 지적돼 온 판결문 긴 문장도 많이 짧아졌다. 한 문장은 글자가 50자 정도일 때 가장 읽기 편하다고 한다. 대법원이 1994년 판례집에 실린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한 문장에 사용한 글자 수는 평균 394.1자 였다. “판결문 읽다가 숨 넘어간다”는 표현은 그래서 나온 말이다. 대법원은 문장을 짧게 쓰고 구두점을 적절히 찍을 것을 판사들에게 권하고 있다.

 

시대의 거울이 된 판결문,
이런 게 있었다

판결문의 문체는 무미건조합니다. 제3자의 눈으로 사건을 분석하고 법률을 객관적으로 해석해 적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판사들의 육성(肉聲)이 판결문에 담기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고독한 심판자로서의 고민이 자연스럽게 반영되는 건데요. 이럴 때 판결문은 당대의 사회상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1955년 여대생 등 70여 명의 미혼 여성을 농락한 혐의(혼인빙자간음)로 기소된 박인수 사건이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습니다. 1심 재판장을 맡은 권순영 부장판사는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할 수 있다”며 무죄를 선고합니다. 이 판결문은 1950년대 전후(戰後)의 사회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77년 소액사건 상고 범위에 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민문기 대법관이 명문을 남깁니다. 그는 15 대 1로 소수의견을 내면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한 마리의 제비로서는 능히 당장에 봄을 이룩할 수 없지만 그가 전한 봄, 젊은 봄은 오고야 마는 법. 소수의견을 감히 지키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후 민 대법관은 10·26 사건 상고심에서 “내란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며 소수의견을 밝히고 법복을 벗었습니다.

96년 12·12, 5·18 사건 항소심을 맡은 권성 당시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을 깼는데요. “자고로 항장(降將)은 불살(不殺)이라 하였으니 공화(共和)를 위해 감일등(減一等)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혀 화제가 됐습니다.

2000년 헌법재판소의 ‘과외 금지 위헌’ 결정 때는 이영모 재판관이 ‘반대’ 소수의견을 냈습니다. 그는 “지금은 가진 자 스스로가 자제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시기며 사회, 경제적 약자의 외침에 귀 기울여야 할 시기”라며 외환위기로 어려움을 겪는 서민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냈지요. 2007년엔 박철 서울고법 부장판사(현재 변호사)가 임대아파트 퇴거 요구를 받은 70대 노인의 손을 들어주며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 달라고 요구하는 원고의 소장에는 찬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고 했습니다. 지난해 9월 조병현 서울고법 부장판사(현 부산지법원장)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형 건평씨의 형을 낮췄는데요. “그토록 자랑스러워 했던 동생이 자살하면서 이제 해가 떨어지면 동네 어귀에서 촌부들과 신세를 한탄하는 초라한 시골 늙은이의 외양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중앙일보 권석천 기자 (2010.7.16)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금과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식 4월 21일 개최
  • 우영자-피터 오-풍산초 학생들 이색 미술 수업
  • “조합장 해임 징계 의결” 촉구, 순정축협 대의원 성명
  • 순창군청 여자 소프트테니스팀 ‘리코’, 회장기 단식 우승
  • [열린순창 보도 후]'6시 내고향', '아침마당' 출연
  • 재경순창군향우회 총무단 정기총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