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23) 김상기 독립투사, 구국 일념으로 일관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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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23) 김상기 독립투사, 구국 일념으로 일관한 삶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12.19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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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기 지사의 출생지인 복흥면 하리 사창마을 전경.
▲김상기 지사의 출생지인 복흥면 하리 사창마을 전경.

김상기(金相璣, 1855-1926)는 유학자이자 독립투사이다. 조선 말엽 1855년(철종6년) 1월 7일 상치등방 사창(현재의 복흥면 하리 사창마을)에서 아버지 김정수와 어머니 연일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치옥(穉玉), 호는 성암(省庵)이며, 본관은 울산이다. 하서 김인후의 14대손이며 자연당 김시서의 9대손이다. 어머니 정씨는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의 후예인 란의 딸이다.
김상기는 1900년(광무 4년)에 김노수(金魯洙) 등 여러 후손과 함께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하서 김인후를 추모하기 위해 복흥면 상송리에 낙덕정(樂德亭)을 건립하기도 했다. 낙덕정은 팔각 단층 지붕 형태로 되어 있으며, 주변의 원림과 어울려 의연하게 서 있다.

효성 지극한 선비

그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정직하고 효성스러워 부모와 조상을 섬기는데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병환 중일 때였다. 의원이 와서 보고 개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날은 마침 집안에서 아들을 낳은 지 이틀째가 되는 날이었다. 예부터 산고에 살생은 절대 금기로 지켜오는 터여서 주위 사람들이 모두 말리는데도 김상기는 개의치 않고 개를 잡아 아버지의 병환을 낫게 했다고 한다. 개를 잡았어도 그 뒤로 집안에 별 탈이 없자 주변 사람들은 모두 “사기(邪氣, 요사스럽고 나쁜 기운)가 효를 범하지 못했다”라고 감복했다.
그는 사람을 사귐에는 장중한 선비가 아니면 얼른 가까이하지 않았다. 언제나 책을 가까이하며 생활해서 경전은 물론 백가제서(百家諸書)에도 통하지 않은 데가 없었다. 때때로 기묘사적 항의신편(己卯事蹟 抗議新編)을 등초(원본에서 베껴 옮김)한 것을 읽으며 말하기를 “비록 초야에 묻혀있는 선비일지라도 나라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정성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했다고 한다.

최익현과 만남

1905년 실질적으로 국권을 빼앗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매국 행위에 앞장선 을사5적을 내치고, 백성 된 사람 모두가 의병이 되어 이 땅에서 왜적을 몰아내 국권을 회복하자는 외침이 전국 곳곳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 이때 김상기는 이 땅에서 왜적을 몰아내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여러 지사와 만나며 거의(擧義)를 계획했다.
이때 위정척사파의 중심인물이었던 면암 최익현은 충남 청양군을 떠나 정읍 산내면 종성리에 내려와 돈헌 임병찬과 만나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수립했다. 최익현은 거사 장소를 태인 무성서원으로 정한 뒤, 담양 용추사로 내려갔다. 용추사 모임에서는 장성의 송사 기우만(奇宇萬), 담양의 녹천 고광순, 금포 이항선(李恒善) 등 호남지방 유생 50여 명이 회동하여 항전 방책을 논의했다. 113명에 달하는 지사들의 연명부인 ‘동맹록(同盟錄)’을 작성하고, 호남 고을마다 격문을 보내 외세를 척결하고 부패한 관료들을 처단할 목적으로 거병함을 밝히고 양심적인 지사들에게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이때 김상기도 용추사(龍湫寺)에서 면암 최익현 일행과 회동하게 된다. 이때가 1906년 음력 윤 4월 8일이었다. 이 자리에서는 중심인물들이 최익현과 협의하여 거사를 위한 책임을 분담했다. 최익현은 순창의 적을 공격하고, 고광순은 곡성의 적을 치며 김상기는 송사 금포와 함께 그 뒤의 동지를 규합하는 일을 맡기로 했다. 최익현이 이끌었던 의병부대가 태인 무성서원에서 출발하여 순창으로 진격하는 동안 김상기는 포수 수십여 명을 동원하고 의병을 불러 모으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김상기는 용추사에 머무는 동안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朝野雖居異(조야수거이)
조야의 처지 비록 다르다 하나
戀君一體同(연군일체동)
임금 그리는 마음 모두 같으니
何論成敗事(하논성패사)
어찌 일의 성패를 논하리오
盡萃誓蒼穹(진췌서창궁)
힘을 다하기로 하늘에 맹세하리로다

1906년 6월 중순 최익현 의진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태인ㆍ정읍ㆍ내장산으로 진군했고, 복흥면 구암사(龜巖寺)를 거쳐 순창읍으로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 의병부대는 6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최익현은 의병부대를 진압하러 온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로 구성된 관군과 싸우는 것을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해 의병들을 해산시켰다. 결국, 최익현과 지휘부는 관군에게 모두 체포되었고, 최익현은 대마도로 유배되어 1개월 후 순국했다.

순천 전투에 참여

최익현이 이끈 의병부대는 순창에 이르러 의병대의 해산, 면암의 순절로 허망한 끝을 보았지만, 당시 이에 참여했던 800여 우국지사들은 이후 각지에서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 대항해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김상기도 더욱 치밀하게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준비에 들어갔다. 그는 각지를 방문해 동지를 규합했다. 2∼3개월이 지나 어느 정도 거사 분위기가 성숙하였다고 생각되자 그는 담양의 이항선과 함께 그가 이끌던 채상순, 채영찬, 전형대, 마부(馬夫)인 한춘서 등을 이끌고 지리산 아래 하동 화개동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그들은 다시 포수 50여명을 규합한 뒤 잘 알고 있던 광양의 운정 백낙구를 초청해 전군의 사령장에 추대했다. 그리고 정읍의 유병우, 순창의 노태원, 강릉의 이광선, 능주의 양공거 등과 진용을 정비했다. 그들은 그해(1906년) 11월 6일(음 9월 20일) 밤 순천을 기습해 적을 물리치고 순천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곧 이은 왜군의 반격으로 패하게 되어 군사는 흩어지고 사령장인 백낙구는 적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이때 김상기도 최익현 휘하에서 대포장이었던 채영찬(蔡泳贊)이 거느린 부대와 합세했다. 순천을 점거하려고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실패했다. 김상기도 체포되어 왜경에게 극심한 문초를 받고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었다.

꺼지지 않는 독립 의지

1907년 고광순, 이항선과 함께 장성으로 옮겨 다시 재기를 모의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910년에 나라를 빼앗긴 뒤로는 조국 독립의 계책만을 연구하고 지냈다. 1913년 2월 고종의 밀지를 받은 임병찬, 전용규(田鎔圭) 등이 비밀 결사인 독립 의군부(獨立義軍府)를 조직했을 때 ‘특승 정삼품(特陞正三品) 통정대부(通政大夫) 토영 참서관(討營參書官)’에 임명되어 활약했다. 그러나 기밀이 누설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1919년에 고종이 승하하자. 참곡관에 들어가 장례를 마치고 돌아왔다. 이후 김상기는 순창에서 오로지 독서와 후진 양성에만 진력했다.
1926년 5월 26일 망국의 한을 가슴에 안은 채 72세 나이로 복흥면 사창에서 생을 마쳤다. 그의 작고 소식이 알려지자 전날 함께 활동한 동지인 담양의 금포 이항선이 달려와, 선생이 먼저 가시니 적을 쳐서 광복할 대계를 이제 누구와 다시 의논하겠느냐며 통곡했다. 원근의 많은 선비도 찾아와 대한의 의사(義士)가 서거했다며 그의 죽음을 애통했다. 김상기의 묘는 복흥면 금월리 대각촌 앞산 기슭에 있으며 저서로는 《성암유고》(省庵遺稿)가 간행되었다. 정부는 김상기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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