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그리고 세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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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그리고 세밑
  • 림양호 편집인
  • 승인 2019.12.26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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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크리스마스’ 화려하고 다채로운 조명, 북적이는 선물 가게, 흥겨운 파티. 크리스마스와 연관돼 떠오르던 풍경이 현실에서 많이 사라졌다. 현란한 불빛과 가게마다 소리 높여서, 거리에 가득했던 캐럴도 듣기 힘들다. 크리스마스(Christmas)는 ‘구주로 오신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예배 의식을 드리는 날’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며, 이웃을 돌아보며 따뜻한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다.
크리스마스와 함께 기억되는 ‘스크루지’ 영감은 영국의 문호,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의 주인공이다. ‘스크루지’는 인정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수전노이다. 그러나 성탄절 전야에 유령에 이끌려 자신의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모습을 돌아보며 ‘개과천선’ 한다. 작가는 이 소설을 “울다 웃다, 다시 울었고, 모두가 잠자리에 들었을 한밤중에 캄캄한 런던 거리를 이삼십 킬로미터쯤 걸어 다닐 정도로 흥분한 상태로 써나갔다”라고 밝혔다. 당시(1843년) 영국은 어린아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탄광이나 굴뚝에 들어가 일해야 했고, 런던 장례식장의 절반에서 열 살 안 된 어린이들의 장례를 치렀다고 전해온다. 작가는 자신의 가난과 가난한 사회에서 이웃을 배려하고 모두 즐거운 성탄절 분위기를 상상조차 할 수 없어 ‘전통적인 크리스마스 정신’을 일깨우려고 이 소설을 썼다고 전해온다.
이 소설이 주는 메시지 가운데 ‘무지’와 ‘궁핍’은 섬뜩하다. 가난의 사회적 문제는 지금까지 계속된다. “가난한 아이들이 교육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것은 모든 인류의 책임이라는 작가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적용된다.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가장 절실한 사회적 행위가 교육이라면 빈부 차이로 차별받는 교육환경을 바로 잡아야 한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성탄절이 ‘구세주’ 탄생이라는 영적 의미를 상실한 채 향락을 즐기는 축제일로 변질되고 있다는 비판이 일었다. 이웃사랑과 자선, 예수 탄생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보는 성탄절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물신주의의 발달로 지나친 소비 풍조에 이용되는 현상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그러나 성탄절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삼 일만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 승천하신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억하고 축하하는 절기”이며,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 영광에서 낮은 땅으로 겸손히 온 예수의 탄생을 기억하며,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의 친구가 되셨던 예수의 삶을 생각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사하며 서로를 사랑으로 돌아보는 절기”이다.
성탄절과 세밑을 보내며 새해를 맞는 이들은 ‘소외되고 어려움을 당한 이웃을 사랑으로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 바쁜 생활 속에 미처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주변과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복된 시간, 어린이들이 벅찬 감동을 품고 자라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병들어 마음이 외로운 이, 홀로 외롭게 지내는 이, 어려운 일을 당한 이웃, 이런저런 오해로 묶여있는 관계까지 따뜻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화해되기를 소망한다.
세상은 다양하게 변하지만, 교회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며 찬양한다. 안타까운 것은 성탄절을 지낸 세밑 풍경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국회에서는 무제한 토론을 앞세워 위임받는 권리를 내팽개친 ‘불량’들의 행태가 꼴불견이다. 광화문과 여의도에 자리 잡은 ‘진영’은 언제 해체될지 기약이 없다.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칼바람 부는 망루에 올라간 지 오래다. 이들의 억울한 호소는 메아리 없는 아우성으로 맴돌 뿐이다. 강남 집값은 ‘천정부지’지만 영세업자들의 처지는 ‘급전직하’다. 서민들은 생존의 위협 속에서 스산한 세밑을 맞고 있다. ‘촛불혁명’이 ‘검찰칼날’에 막혀 개혁의 진로가 환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언론이 진영논리에 빠져 제 역할을 안 한다. 지역 언론도 마찬가지다. 기득권 세력에 맞서 싸우기보다 눈치 보는 편한 길로 접어든다. 변명이 다양하다. 하지만 희망을 버리면 안 된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언론과 언론인으로서의 본분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어떤 압박과 탄압, 경제적 어려움에도 언론의 길을 바르게 가려는 자세를 포기하면 안 된다. 기자로서의 양심은 지켜야 한다. 시민들의 각성이 타협하며 줄 서는 언론과 언론인을 결코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싸워야 한다.
예수는 “폭력이 아닌 사랑으로, 죽임 아닌 부활 생명으로, 거짓 아닌 진리를 주려고 오셨다”고 한다. 성탄절을 보낸 세밑 언저리에서 ‘거짓 아닌 진리’를 알리는 바른 언론이 되도록 더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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