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24) 성황대신, 설공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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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24) 성황대신, 설공검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1.01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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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성황 신앙의 역사적 변화가 기록돼 있어 중요 민속문화재 제238호로 지정된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
▲우리나라 성황 신앙의 역사적 변화가 기록돼 있어 중요 민속문화재 제238호로 지정된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

 

‘성황제(서낭제)’는 한 고장의 수호신인 성황신에게 드리는 의례다. 역사학자들은 성황 신앙이 중국에서 처음 들어온 시점을 943년(고려 혜종 즉위년)에서 996년(성종 15)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시대 지방 호족들은 자신의 가문에서 성황신을 배출하고 성황제를 주도하면서 지역에서 권세를 누렸다. 성황신은 지역 수호신으로 지역을 지킨 장군을 배향(신주를 문묘 등에 모심)하기도 하지만, 향촌권을 장악한 가문에서 영웅적인 인물이나 가문을 빛낸 출중한 인물을 성황신으로 배향하는 풍조가 하나의 전통이었다.
순창 지역에서 역사적으로 성황신을 숭배했음을 구체적으로 알려 주는 사료는 순창 성황대신 사적기와 성황대신 사적현판 등이 있다. 순창설씨 가문의 설공검이 성황대신으로 배향되었고, 대모산성 양씨 부인과 함께 고려 후기부터 매년 성황당에서 제사를 지내 왔다.
설공검은 어떤 인물이었기에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격인 순창의 성황대신으로 추존되었을까?

설공검과 순창설씨 가계

설공검(薛公儉, 1224-1302)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상검(常儉), 호는 경재(敬齎), 본관은 순창이다. 그는 1224년(고려 고종 11)에 순창군 팔덕면 월곡리에서 아버지인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출신 신(愼)과 밀양박씨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어났다.
순창설씨는 설거백(薛居伯)을 시조로 받들고 경주를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오다가 36세손 설자승이 1124년(고려 인종 2) 호부시랑이 되고 순화 백(순화는 순창의 옛 이름)에 봉해지자 본관을 순창으로 고쳤다. 순창설씨는 설자승(薛子升)이 1126년 아내의 고향인 순창으로 낙향하면서 토종 성씨로 자리 잡았다. 설자승을 중시조라 하기도 한다. 설씨 집안은 순창에 들어온 이후에 일약 명망 가문으로 성장했다.
설자승으로부터 4대손이 되는 설공검까지의 계보를 살펴보면, 설자승-설정숙-설선필-설신(1196~1251)-설공검(1224~1302)으로 이어져 온다. 설자승의 2대손이자 설공검의 조부인 설선필(薛宣弼)은 옥천조씨(玉川趙氏)와의 사이에서 네쌍둥이로 여덟 아들을 낳았다. 여덟 명 가운데 세 명이 과거에 급제함으로써 옥천조씨는 국대부인(國大夫人)에 봉해졌다. 과거급제자 세 명 가운데 한 명이 설신(薛愼)이다. 설신이 낳은 아들 가운데 설공검과 설인검(薛仁儉)이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고, 그중 설공검이 성황대왕으로 추봉(죽은 뒤에 직위를 내림) 받은 것이다.

설공검의 활동…79세 별세

설공검은 고려 고종(高宗) 때 교동감무(喬桐監務)를 거쳐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가 되었고, 고종 말년에 급제해 예부 낭중(禮部郎中)이 되었다.
1271년(원종 12)에 군기감(軍器監)이 되어 세자 심(諶, 훗날의 충렬왕)이 원(元)나라에 인질로 떠날 때 상서 송분 등과 함께 세자를 모시고 따라갔다. 이때 원나라에 머물게 된 여러 신하는 괴롭고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세자에게 일본을 징벌하는데 합류한다고 거짓으로 핑계 대고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이에 공검은 이는 간사한 꾀이므로 군자가 꾀할 바가 아니니 정당하게 돌아가는 날을 기다리자고 주장했다. 그는 세자를 호종(扈從)해 원나라에 갔다 온 공으로 거듭 승진해 우부승선(右副承宣)이 되었다.
1276년(충렬왕 2)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知貢擧) 허공(許珙)과 함께 과거시험을 관장해 진사(進士) 33인과 명경(明經) 1인을 뽑았다. 그 뒤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1278년(충렬왕 4) 밀직부사(密直副使)로 필도치(必闍赤, 서기직)가 되어 궁중의 기무 처리에 참여했다. 권문세가의 횡포로 나라의 기강이 혼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쓸모없는 벼슬아치를 몰아내고, 어질고 재능 있는 사람을 등용하는 등 쇄신을 단행해 국정이 올바른 궤도에 오르는데 이바지했다.
이듬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었고, 그 뒤 감찰대부를 거쳐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가 되었다가 곧이어 참리(叅理, 현 부총리급)로 승진했다. 나이가 들어 사직을 청원하자 찬성사(贊成事, 정2품)로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했으나, 다시 중찬(中贊, 고려 후기의 국무총리격)으로 올라 벼슬을 마쳤다. 1302년(충렬왕 28)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조정에서는 문량(文良)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체협공신(禘祫功臣)으로 충렬왕 묘정에 배향케 했다. 1314(충해 2)년에 순창읍 성황사(城隍祠)에 목상(木像)을 만들어 안치하고 이 지방의 수호신으로 1년에 4차례 제사를 받들었다. 1368(공민 17)년 개성 송애서원(松涯書院)에 배향. 1788(정조 12)년 팔덕면 배실리 무이서원(武夷書院)에 주자(朱子)와 더불어 배향되었다.
설공검의 묘는 전남 광산군 본량면 선동리에 있고, 그곳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봉안문(奉安文)과 상량문(上梁文)은 좌찬성 송환기(宋煥箕)가 짓고 신도비문(神道碑文)은 이조판서(吏曹判書) 민병승(閔丙承)이 지었다.

성황신으로 배향된 이유

설공검은 성품이 청렴하고 정직했으며 남을 공손히 대했고 늘 검소하게 생활했다. 조정의 관리 중 6품 이상 사람에게 부모상(喪)이 나면, 평소 모르는 사이라도 반드시 소복을 하고 찾아가 조문했다. 또 누가 집으로 찾아오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급히 신을 거꾸로 신고 나가서 맞이했다고 한다.
언젠가 병으로 누워 있을 때 순천군(順天君) 채홍철(蔡洪哲)이 문병을 와 보니, 삼베이불에 왕골자리를 깔고 간소히 지내는 것이 마치 절간의 중과 같았다. 채홍철이 나와서 탄식하기를 “우리 같은 무리를 공과 비교하면 이른바 땅벌레가 황학(黃鶴)에 비교되는 것과 같다”고 탄복했다.
대제학 박의중(朴宜中)과 한림학사 설장수(楔長壽)는 상소하기를 “공의 후손에게 대대로 음식을 주며 비록 죄를 지었다 해도 용서하고 벼슬길을 열어 주라”고 했고, 서장관 홍사검(洪師芡)은 설공범ㆍ설인검 형제를 이윤(伊尹, 은나라의 명신)과 여상(呂尙, 주나라의 명신)에 비교해 칭송했다. 고려말 조선초에 정몽주ㆍ정도전 등 거의 모든 사대부를 키워 낸 인물이었던 목은 이색(牧隱 李穡)은 설공검을 주나라 개국공신인 소공(召公)과 태공(太公)에 비교했다.
설공검ㆍ설인검 형제는 상소를 올려 성균관을 창설할 것을 제의했고, 성균관(成均館)을 창립해 문풍을 크게 진작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이에 이색은 “공의 형제는 문장과 도덕이 당대의 으뜸이다. 공자의 도(道)를 크게 진작시킨 공이 있다”라고 칭송했다.
1375(우왕 1)년과 1654(효종 5)년에 공의 후손에게 군보(軍保, 병역 면제)와 부역을 면해주라는 수교(受敎)가 있었다.
설공검이 성황신으로 배향된 것은 높은 벼슬이나 순창설씨 가문의 지역 내 영향력 못지않게  그 인품이 주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내용은《고려사》<열전> ‘설공검전’과《신증동국여지승람》<인물조>에 실려 있어, 설공검이 국가적으로 매우 존경받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연유로 순창 고을 사람들이 우러러 성황대왕으로 받들게 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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