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현대사(17) 1972년의 대중가요와 한국사회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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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현대사(17) 1972년의 대중가요와 한국사회 ②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1.22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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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시대를 지배한 음악가 ‘박정희’
대중가요와 함께 살펴본 20세기 후반의 한국사회(17)

1972년 12월 23일,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로 임기 6년의 대통령직에 다시 올랐다. 박정희는 ‘5ㆍ16 군사쿠데타’와 10월 유신 등 쿠데타 2번을 일으켰고, 집권 18년 동안 계엄령 3번 선포(31개월)했고, 위수령 3번(5개월), 각종 긴급조치 9건(69개월 지속)을 발동했다. 이들 공포의 비정상적인 기간은 총 105개월로 박정희 집권 기간인 220개월(18년)의 약 절반에 해당한다. 박정희 통치시대는 계엄령, 위수령, 긴급조치가 통치 기간의 절반에 달한 ‘억압과 공포의 시대’였다. 특히 긴급조치로 상징되는 유신독재 중반기 이후는 ‘취중언사’에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던 상호불신과 자기검열의 엄혹한 시대였다. 

▲이수미 여고시절 앨범.
▲이수미 여고시절 앨범.

 

박정희가 만든 ‘국민가요’
<새마을노래>와 <나의 조국>

유신시대에 대한민국을 지배한 최고의 음악가는 단연 박정희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노래의 중요성을 잘 알고 노래를 활용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아마 그가 교사였고 군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군가 없는 군대, 교가나 응원가 없는 학교는 생각할 수 없다. 군가나 교가는 반복을 통해 어떤 내용을 인식시키는 데에 매우 효율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국론 분열’이 없는 병영국가를 꿈꿨다. 유신 이후 온 국민이 함께 부르는 노래를 만들어 틈만 나면 반복적으로 들려주고 부르게 함으로써, 사회 전체를 일사불란한 군대처럼 움직이고 싶어 했다.
<동백아가씨>를 왜색가요라고 금지한 나라에서 대통령 박정희가 친히 작곡했다는 일본 창가 풍의 <새마을노래>는 새벽종이 울릴 때만이 아니라 날이 저물도록 온 나라에 울려 퍼졌다. <새마을노래>는 ‘도레미솔라’를 쓰는 장조 5음계 노래다. 7음계에서 4번째와 7번째 음을 뺀 일본식 ‘요나누끼 음계’를 사용한, 식민지시대 학교 창가 풍이다.
박정희에게 학생과 국민은 계몽과 통치의 대상이었고, 늘 무언가를 주입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래서 ‘공부 잘하자’, ‘효도하자’, ‘나라에 충성하자’, ‘부지런히 일하자’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새마을 노래>가 꼭 그런 모습이다.
<나의 조국>은 한술 더 뜬다. 이 노래는 선율만 보자면 전형적인 단조 트로트다. ‘레’와 ‘솔’을 뺀 ‘라시도미파’의 단조 5음계다. “백두산의 푸른 정기 이 땅을 수호하고/ 한라산의 높은 기상 이 겨레 지켜 왔네-”를 트로트를 부를 때처럼 손뼉을 치면서 느리게 불러 보면 영락없는 트로트 가락이다.
이러한 단조 트로트 선율은 1920년대 일본에서 건너와 일제강점기 대중가요의 대표적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흔히 ‘왜색가요’라고 지탄받는 이런 트로트 선율은 대중가요에만 썼던 것이 아니라, 일본 군가에도 널리 쓰였다. 해방 후 우리나라 군가에서는 ‘레’와 ‘솔’의 비중을 높여 점차 7음계로 나아가면서 왜색을 줄여나갔는데, 난데없이 대통령이 지은 노래에서 ‘왜색’이 당당하게 부활한 것이다.

이수미 <여고시절>

흰 칼라에 빳빳하게 풀을 입히고, 치마가 구겨질세라 조심스러워했던 6-70년대의 여고생들. 그 시절을 회상하는 중장년 여성이면 가장 먼저 추억할 노래가 바로 <여고시절>이다.
작곡가 김영광은 “오아시스 레코드사 소속 여자가수 중에서 이 곡에 맞는 가수는 너뿐이다. 수미 네가 불러야 한다”면서 단 3대의 기타만으로 녹음에 들어갔다.
단아한 외모와 애절하고 여성적인 음색을 소유한 이수미는 <여고시절>이 대 히트하며 일약 국민 여가수로 떠오른다. 이 노래의 뒤를 이어 여고 시절을 소재로 한 <자주색가방>(1973, 방주연), <여고졸업반>(1975, 김인순) 등도 크게 히트했다.

패티김 <이별>

패티김ㆍ길옥윤 부부가 별거하고 있던 1972년 어느 날이었다. 뉴욕에 머물던 길옥윤이 패티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패티, 내가 곡을 썼는데 들어 볼래요?”
별거 중에도 길옥윤은 패티김에게 계속 곡을 지어 넘겨주곤 했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길옥윤은 특유의 나지막한 음성으로 노래를 끝까지 불렀다. 가사에는 이별에 대한 회한과 패티김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길옥윤이 보내온 악보에는 제목이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로 되어 있었다. 이에 패티김이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이별>로 고치면 어떻겠냐고 길옥윤의 동의를 받아 음반을 발매했다. <이별>은 나오자마자 전국에 종일 울려 퍼졌고, 결과적으로 둘의 이혼을 암시한 곡이 되어 버렸다. 두 사람은 다음 해, 1973년 조선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혼을 선언한다.

윤형주 <라라라(조개 껍질 묶어)>

윤형주의 <라라라(조개껍질 묶고)>는 여름철의 낭만과 상큼한 연애의 기운이 살랑거리는 사랑 노래이다. 윤형주는 고교 여름방학 때 친구들과 함께 충남 대천 해수욕장으로 여행 가서 연상의 여대생들과 어울리며 밤새워 놀았던 기분 좋은 추억을 노래로 담았다.
이후 이 노래는 전국의 무수한 해변과 야영장에서 분위기를 돋우는 최고의 캠프송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문주란 <공항의 이별>

문주란의 <공항의 이별>은 해외 파견 근로나 취업 등 일반인의 해외 출입이 늘면서 변화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사랑 노래다. 공항에서 일어난 숱한 이별의 정서를 담은 가사는 저음으로 비장하게 노래하는 문주란의 목소리에 실려 큰 공감대를 형성했다. 문주란은 이후 1973년 <공항에 부는 바람>, 1974년 <공항 대합실>까지 공항시리즈를 발표한다.

김정미 <간다고 하지 마오>

김정미는 <간다고 하지 마오>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1973년 <바람>ㆍ<햇님>ㆍ<봄>, 다음 해에는 <이건 너무 하잖아요>를 발표하며 ‘제2의 김추자’로 불렸다. 김정미는 김추자보다 음폭이나 가창력은 다소 부족했지만, 특유의 가늘고 몽환적인 음색은 사이키델릭 장르를 구사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신중현은 자신의 작품을 가장 잘 소화해낸 가수로 김정미를 꼽을 정도였다.
1977년 6년간의 짧은 음악 활동을 접고 가요계를 떠나며 대중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던 김정미가 팬들 사이에서 다시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90년대 중반이었다. 당시 신중현의 위상이 주목받으면서 신중현 사단의 일원이었던 김정미도 함께 조명받기 시작했다. ‘당시로선 너무나 전위적이어서 세속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던 음악’이란 평을 받으며 그녀의 음악은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패티김 이별 앨범.
▲패티김 이별 앨범.
▲간다고 하지 마오를 부른 김정미.
▲간다고 하지 마오를 부른 김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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