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분다(21)/ 입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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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분다(21)/ 입춘
  • 선산곡
  • 승인 2020.02.05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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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입춘(立春)이다. 겨울이 지났다. 세월을 덧셈하는 의미로 생각하자니 ‘어느새’라는 부사가 앞에 놓인다. 삼백육십오일, 그 똑같은 흐름으로 시간은 가지만 제자리로 다시 오는 것이 계절이다. 그러나 전과 같은 것은 없다. 같아 보일 뿐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만나기 위해 보면서 떠나는 길이 세월이다. 그렇게 맞는 입춘. 어느새 또 봄이다. 
지난겨울엔 눈도 오지 않았다. 오늘이 봄의 시작이라는 입춘인데 밤부터는 눈이 온단다. 한 줌의 춘설(春雪)이 제호(醍醐)보다 낫다는 시구(詩句)처럼 백설양춘(白雪陽春)의 풍경을 기대해볼까. 그러나 그 말들은 상상으로만 아름다운 시(詩)일뿐이다. 춘첩자(春帖字)도 없다. 써본지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파올로 프레주’의 트럼펫 연주 <달콤한 고통>을 눈 뜨자마자 들었다. 선곡을 의도하지 않았지만 듣기에 나쁘지 않다. 힘겨웠을 때는 정작 몰랐지만, 회상의 자리에서 비로소 또렷이 각인되었던 고통. 최근에 내가 지닌 것 중 하나다. ‘달콤한 고통’의 정답은 없다. 그러나 그 말만큼은 지금의 내 마음이기도 하다. 이어 흐르는 음악이 <아다지오>, 작곡자가 ‘알비노니’가 아니라 ‘지아조토’라는데 공식적인 정정발표는 없다. 관현악 합주가 아닌 ‘자베르 바르누스’가 연주하는 오르간의 독주 실황이 입춘의 아침에 잔잔히 흐른다. 연주가 끝나고 박수소리가 무 자르듯 끊어지지 않아 다행이다. 

책 몇 권 가지러 간 시골 우거 풍경은 아직 한기에 차 있다. 차 소리만 들려도 반가워하던 뒷집의 진돗개는 꼬리도 흔들지 않았다. 잔디밭은 흙이 부풀었는지 스펀지를 밟은 것처럼 푸석푸석하다. 봄풀, 질긴 생명이 계절을 앞서 푸릇푸릇 돋아나기 시작했다. 날만 풀리면 잔디의 적이라는 이름으로 호미갈고리 끝에 뽑혀 나가겠지. 그들에겐 잡초라는 이름이 억울할 것이다. 
느티나무, 벚나무, 자작나무, 때죽나무가 냇가 둑에 줄지어 서 있다. 나무끼리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서로의 성장에 애먹는 모습이 작년부터 눈에 띄기 시작했다. 애당초 거리를 측정하지 않고 심은 것이 내 실수다. 잎이 돋기 전에 눈물을 머금고 몇 그루 베어내야 할 것 같다. 한 그루 나무 생명을 마감시키기 위해 톱질을 해야 하다니. 잎사귀가 있어 작년에 차마 하지 못했던 일을 이제 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계곡에 바람이 지나간다. 냇물을 아예 점령해버린 갈대들이 하얀 모습으로 서 있다. 키 저리 큰 것은 소갈머리가 없는 탓인가. 어쩌자고 제 몸의 물기 다 소진해놓고 미라처럼 껍데기만 남아서 서걱거리는지 모르겠다. 밤 되어 바람이 계곡을 누비거든 몸들 비벼 나는 소리로 귀신을 쫓는지도 모른다. 하긴 저 갈대들도 새잎 나면 사라져 보이지 않고 숨는다. 한겨울 잘 버티고 서 있었지. 그러나 냇물에 갈대도 이젠 공해다. 
물 흐르는 소리는 여전히 들린다. 물소리가 청량하다. 이 냇가 내가 이름 붙여 작수(汋水)라 했다. 졸졸졸 흐르는 소리를 지닌 냇물이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작수에 입춘.
봄,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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