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26) 설신…뛰어난 외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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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26) 설신…뛰어난 외교가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2.05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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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군 침략 때 뛰어난 외교력으로 맹활약

한국사 권위자인 하버드대 제임스 팔레 교수는 한국 역사에서 발견되는 ‘특이한 사실’로 “중국과 북방의 세력들이 충분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왕조를 무너뜨리지 않은 것”을 꼽는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940년대 북중국 일대를 통일했던 거란, 13세기 유라시아 대륙을 평정한 몽골, 17세기 청(淸)나라 등을 제시한다.
팔레 교수는 “한반도 왕조들이 중국 대륙의 세력변동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실용적인 외교를 통해 자신을 스스로 보존할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실용적인 외교’로 가장 유명한 사례는 세치 혀로 거란의 40만 군사를 물리치고 강동 6주를 획득한 서희(徐熙)의 담판일 것이다. 서희 못지않게 몽고 침략기에 크게 활약한 이가 있으니 바로 순창 출신 설신(薛愼)이다.

▲설신이 태어난 팔왕마을 전경.

 

순창성황신 설공검의 아버지

순창설씨는 경주를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오다가 36세손 설자승(薛子升ㆍ설신의 증조부)이 1124년(고려 인종 2) 순화백(순화는 순창의 옛 이름)에 봉해지자 본관을 순창으로 고치고 순창의 토종 성씨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이후 설신-설공검과 인검 형제-설지충으로 이어지면서 일약 명망 가문으로 성장한다.
설신의 아버지 설선필(薛宣弼)은 검교 군기감(軍器監ㆍ정3품)이었으며 어머니는 순창군 사호 조숭영(趙崇穎)의 딸이다. 《고려사》<열전> 기록에 의하면 설신의 어머니 조씨는 젖가슴이 4개였는데 8형제를 낳아 길렀으며, 그중 3형제가 과거에 급제해 정4품 국대부인(國大夫人)에 봉(封)해졌다. <설씨 2000년사>에는 쌍둥이 4번에 8형제를 낳았다고도 하며, 북한에서 반입된 《고려사》(국립도서관 소장)에는 조씨부인은 젖꼭지가 4개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설신(薛愼ㆍ1196∼1251)은 순창군 팔덕면 파랑태(파랑터ㆍ현 산동리 팔왕마을)에서 8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휘는 신(愼), 자는 신지(愼之). ‘성격이 곧고 두뇌가 명석하며 도량이 넓었다. 지방관으로 있을 때 민정을 샅샅이 살펴 백성을 부모처럼 섬기고 변방을 지켜 큰 공로를 세운 것쯤이야 태산의 티끌 하나에 불과했다’고 원외랑(員外郎ㆍ정6품 중앙 행정관직) 김백일(金百鎰)이 지은 묘지명에 전하고 있다. 
설신은 고공낭중(考功郞中) 최입기(崔立基)의 딸과 결혼해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 공검은 중찬(中贊, 고려 후기의 국무총리격)의 벼슬에 올랐고 순창의 성황대왕으로 추봉(죽은 뒤 직위 내림) 받았다. 차남은 조계종의 중이 되었으며, 삼남 인검은 벼슬이 평장사에 이르렀다. 
 

문무 겸비한 관리

설신은 20세 때 사마시에서 2위를 하고, 31세 때 과거에 급제했다. 1216(고종3)년에 함풍현(전남 함평) 감무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명성이 높아지자, 당시 무신정권의 집권자 최충헌이 관리로서의 재능을 인정해 포상하고 식목도감 녹사(式目都監錄事)로 올려주었다. 누차 승진해 1226(고종13)년 변방인 북계를 잘 지킨 뒤에 이듬해 예부원외랑이 되어 용주수령(평북 용천군수)으로 나갔는데 거기에서도 백성들의 믿음을 얻고 치적을 올렸다.
1230년(고종17) 8월, 몽고군이 침입하자 조정에서 각도 안렴사(현 도지사)들에게 출동령을 내렸는데, 전라도안렴사 한윤혁(韓允奕)이 연약해 군을 지휘할 수 없으므로 조정 공론으로 설신을 대신케 했는데, 그는 중론대로 군을 잘 통솔해 왕의 칭찬을 받았다.

무리한 요구에 기지(機智) 발휘

1231년(고종 18) 8월, 살리타이(살례탑)가 이끄는 몽고 대군은 철주(평안북도 철산)ㆍ평주(황해도 평산) 등을 유린한 다음 고려와 강화를 맺고 이듬해 1월에 일단 철군했다. 이때 설신은 왕명을 받고 상장군 조숙창(묘지에는 대장군 조숙장으로 나옴)과 함께 몽고에 사신으로 가서, 고려에 대한 과중한 공물과 동남동녀(童男童女)ㆍ장인의 송출 요구에 대한 고려 측의 입장을 밝히는 표문과 공물(금ㆍ은그릇, 피륙, 수달피 등)을 전했다. 그 글월에는 나라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설신의 고뇌가 잘 담겨 있다. 
- “지난번 왕족과 대관의 자제로 처녀, 총각 각각 500명을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법은 비록 임금이 된 자라도 오직 한 사람의 배필로서 만족하며 첩을 두지 않으므로 왕족의 자손이 번성치 못합니다. 신하들 또한 일부일처로 인해 자녀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왕족과 대관 자제 500명 모두를 귀국에 보내면 누가 왕위와 신하의 직을 이어받아 귀국에 봉사하겠습니까? 귀국이 선린우호를 생각한다면 감당치 못할 이 같은 요구를 감면해 주고 약자를 보살펴 주는 뜻을 보이는 것이 다행일 것입니다.” 
또 요구하기를 “모든 기술자와 공구를 보내라고 했는데, 귀국 군대 때문에 손해 입은 자가 많아 사방으로 흩어진 까닭에 데리고 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자수(刺繡)하는 부인을 보내라 했는데 본래부터 우리나라는 수놓는 부인이 없습니다. 이 정상을 양지해 가엾게 살펴주기 바랍니다. 그 외 서한 속에 언급한 것들은 일일이 도와줄 것입니다” 했다.
설신은 이처럼 공물 공출과 양민ㆍ장인의 송출 피해를 최소화하는 등 성공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돌아왔다. 그 공으로 곧 대부소경(大府少卿)ㆍ어사잡단(御史雜端)이 되었다.

‘세 치 혀’로 몽고 장수를 달래다

1232년(고종19) 12월, 철군했던 불패의 장수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고군이 재차 침입했다. 무신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며 항전했지만 몽고군은 서경(평양)ㆍ개경(개성)ㆍ남경(서울)을 차례로 함락하고 한강을 건너 처인성(용인)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설신은 포로가 되어 처인성까지 끌려갔다. 그는 적군에게 끌려가면서도 몽고군의 남진 속도를 늦추기 위해 꾀를 냈다. 임진강을 건너기 전 살리타이에게 말했다. “우리나라에 전해오는 말에, 외국 큰 관리가 개경 이남의 강을 건너면 불행해진다고 했소. 장군은 부디 남쪽으로 내려가지 마시오.”
이 말에 살리타이는 코웃음을 쳤다. “그런 소리는 당신 나라에서 만든 헛소리요. 누가 나를 막는단 말이오.” 살리타이는 설신의 말을 무시하고 임진강에 이어 한강을 건넜다. 
어느 날 살리타이가 주변 형세를 살피려고 처인성의 조그만 암자 백현원(白峴院)으로 올라오는 것을 본 스님 김윤후가 암자에 숨어 있다가 화살을 날렸다. 그 화살은 살리타이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다. 몽고군은 설신의 앞을 내다보는 지혜에 감복했다고 한다. 장수 살리타이를 잃은 몽고군은 부장 철가의 인솔 아래 북으로 패퇴했으며, 철수하는 도중 개경에 이르러 설신을 풀어 주었다. 몽고군이 그를 죽이지 않고 풀어준 것을 보면 앞서 몽고에 사신으로 갔을 때의 활동상에서 알 수 있듯이, 매우 능란한 외교적 기량을 지녔던 것 같다. 설신을 풀어준 몽고 장수 철가는 그 죄로 파직당했다는 기록이《원사》(元史)와 조선후기 안정복이 저술한《동사강목》에 기록되어 있다. 

말년의 삶

설신은 이후 경상도 안찰사(현 도지사)ㆍ서북면 병마사(현 평안도 군사령관)ㆍ국자감 대사성(성균관대학 총장)ㆍ상서좌복야(정2품) 등 문무 요직을 두루 거쳐 1251년(고종38)에 추밀원부사(현 대통령 비서실장)ㆍ형부상서(법무부장관)를 지냈다. 
1251년(고종38) 6월 계묘일에 향년 66세로 사망했다. 후에 장남 공검이 귀하게 되자 그를 추존하여 순화백을 봉했다. 중앙 고위관리였기 때문에 수도인 개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 묘가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상서 예부원외랑 김백일이 지은 묘지명(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남아 있어 설신의 생애에 관해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다. 

▲김백일이 지은 설신 묘지석.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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