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분다(23)/ 삼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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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분다(23)/ 삼월
  • 선산곡
  • 승인 2020.03.04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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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곡

 

 

삼월이다. 봄일까. 그러나 봄은 아니다. 어떤 시에 이런 구절이 있었던 것 같다. 작가도 제목도 생각나지 않는다.

따듯하게 쏘이던 햇빛도
거짓말이다
아직 기다리던 때는 오지 않았다

해마다 삼월이면 그 말이 새삼스럽게 떠오르곤 했다. 원래 3월은 춥다. 실실 풀어졌다가도 어느 순간 토라진 얼굴로 변해버리는 날씨. 초겨울처럼 도톰한 옷을 입기도 그렇고 가벼운 옷을 입을 수도 없다. 그래서 3월은 소매 끝이 한 겨울보다 더 시린 달이다. 지금 봄을 예찬하기도 낯간지럽고 훌훌 털고 문 밖에 나가기도 두렵다. 코로나19의 악몽은 언제 끝날까. 바이러스의 창궐로 마스크 하나 사기 힘든 세상,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봄은 어디 있는가. 마음은 아직 한 겨울이다. 아직 기다리던 때는 정말 오지 않았다.

책 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글을 며칠 걸러 읽고 있다. 고등학교 첫 등교의 날부터 졸업까지의 소소한 이야기를 쓴 것이다. 써 놓은 일기를 바탕으로 소설형식으로 따로 썼으니 습작의 의미가 깊다. 재학 중에 틈틈이 썼던 기억은 있는데 마지막페이지에 글을 끝낸 날자가 스탬프로 찍혀 있어 내심 놀랐다. 1월18일이 졸업이었고 사흘 뒤 1.21 사태라고 하는 김신조 공비 침투사건이 벌어졌다. 그 열흘 뒤 1968년 2월 2일에 3년의 이야기를 마무리 한 것이다.
50년 만의 재발견이었다. 문장은 수준미달, 공부를 위해 한문단어를 일부러 쓴 것 같다. 생각을 ‘生覺’으로 썼거나, 자신(自身)을 자신(自信)으로 썼던 것처럼 틀린 표기도 더러 눈에 띈다. 노트 서너 권을 장정해 책 두 권으로 만들었으니 웬만한 소설 1권 분량은 넘은 글을 내가 써 두었다니.
‘고목은 타기 쉽고, 고주는 마시기 쉽고, 구우(舊友)는 믿기 쉽고, 고서는 읽을 가치가 있다’는 베이컨의 격언을 맨 앞장 써 놓은 걸보니 우정이 중요했던 보통의 소년이었다. 한일 협정 데모를 막기 위해 6월말에 서둘러 방학을 했던 정부이야기, 이승만 대통령의 서거, 고려대학생들의 오대산 월정사 사고, 월남전 소식 등 역사의 단면도 심심찮게 표현되어 있다. 영화, 문학, 음악, 미술 등 예술에 특별한 관심도 많았던 것 같다. <체이스>란 영화에서 젊은 미남배우 로버트 레드포드를 기억해 둔 것도, 아스투리아스라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에도 관심을 가졌다. 박경리의 소설 <시장과 전장>의 독후감 등 완벽하게 잊힌 그 시절의 이야기가 서툰 기록으로나마 이렇게 생생하게 남아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상권은 표지가 뜯겨져 제목을 알 수 없지만 하권의 제목은 <긍정이냐 부정이냐>인 게 뜻밖이다. 내가 쓴 붓글씨가 제법 선명하다. 
전체적으로 그때의 기록은 ‘아픔’이었다. 나는 대체로 아프고 슬픈 사춘기를 보냈다. 잘 가라했던 청춘의 곱절을 더 보낸 세월이다. 함께 대화를 나누었던 그들 모두 지금 내 곁에 없다. 우정도 부질없고, 꿈도 부질없고, 정열도 부질없어진 언덕의 끝에 서 있을 뿐이다. 허무하게도 나는 지금 혼자다. 우울한 세상이지만 그렇다고 기다리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애달아 할 수만은 없다. ‘봄은 멀지 않으리’ 셀리의 <서풍(西風)에 부치는 노래>라도 외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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