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역사 속 사이비종교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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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역사 속 사이비종교 사건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3.04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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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발표한 최영철 감독의 영화 ‘백백교’ 화면 갈무리.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코로나19’ 감염 ‘시한폭탄’으로 떠오르면서, 외신들도 국내 확산 주범으로 지목된 ‘신천지교회’라는 종교단체에 대해 집중 보도하고 있다.
사람은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동물이지만 생활이 힘들 때, 미래와 사후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에 떠는 나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사이비종교는 그러한 틈을 비집고 기생하는 악질범죄다. 일제강점기 이래 혹세무민한 교리와 황당하고 엽기적인 포교ㆍ예배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던 역대 사이비종교집단에 대해 알아본다.

일제강점기 ‘백백교’ 사건

백백교(白白敎)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1930년대에 존재했던 사이비종교다. 전정운(全廷雲)이라는 자가 1912년에 자신을 금강산 도인이라고 칭하며 함경도 문천군에서 ‘백도교’(白道敎)라는 사이비종교를 창시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전용해(全龍海)가 형제들을 제거하고 1923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기도 가평 등을 근거지로 ‘백백교’(白白敎)를 창시했다. 
전용해는 1923년 조선총독부로부터 공식적으로 포교 허가를 받아 3대 교지를 만들었다. “백백교를 믿으면 몸과 마음이 결백해지고 일체중생은 모두 선남선녀가 된다. 전 세계는 신의 심판을 받게 되는데 서양은 불로 망하고 동양은 물로 망하며, 백백교도만 구원받는다. 30척 이상의 대홍수 재앙이 있은 후에 동해에 새로운 섬이 생겨나는데 이곳은 기린과 봉황이 춤추고 불로초가 있고, 교도들은 질병이 없어 불로장수하며 극락과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허황하기 그지없는 내용이다.
일제 폭압 통치에 시달리면서 희망 없는 삶을 살던 일부 가난한 농민과 어리석은 민중에게 백백교의 달콤한 교리는 한줄기 구원이고 복음이었다. 거기에 궁궐을 방불케 하는 대회당은 믿음을 주었다. 백백교에 끌려온 수많은 사람이 재산을 빼앗기고 부인과 딸은 교주에게 헌상 되었다.
교주 전용해는 무려 14년간이나 음란과 살인극을 자행했다. 그는 학식이 없는 무지한 인간이었지만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해 마음을 끌어들이는 재주가 있었다. 폐금광에 금을 숨긴 다음에 자신(교주)의 힘으로 금광이 다시 터졌다는 식으로 사람을 모았다. 간부들을 각지에 보내 예쁜 딸을 가진 부모들을 골라서 백백교에 입교시킨 뒤 그 딸을 전용해의 시녀로 바치게 했다. 전용해는 이렇게 끌어들인 젊은 여성들을 첩으로 거느리다가 살해하는 것을 능사로 삼았다.
백백교는 표면상 정상 종교인 양 여러 제도를 도입한 척했지만, 신도들의 이탈 방지와 범죄가 들통날 우려가 있으면 교도들을 여지없이 살해했다. 엽기적이고 가공할 살해 암매장이 저질러진 동기를 보면 이렇다. 교주 전용해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경우, 숨어서 불평하거나 탈교할 기미가 있다고 밀고된 경우, 재산을 모두 헌금했다 해놓고 남은 재산이 있음이 발각되었을 때, 공범 만들기 수단인 윤간이나 살인을 거부한 경우 등에 쥐도 새도 모르게 산중으로 연행해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했다. 
살인에는 항상 복수의 신도를 동원해 공범을 만들었다. 그리고 교주가 버린 첩은 간부가 간음하고, 간부의 간음이 끝나면 신도 모두를 윤간 공범자로 만들어 이탈할 마음을 먹지 못하게 했다. 전용해가 도피하기 직전 그가 살던 경성 앵정정 마굴에는 첩 32명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아기가 생기면 운신에 방해가 되고 신격이 손상된다며 병아리 죽이듯 영아 살해도 서슴지 않았던 살인마였다.
백백교 범죄는 ‘사소한’ 일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조부와 부친이 백백교에 빠져 여동생을 교주에게 첩으로 바치고 전 재산을 빼앗긴 유곤룡이란 청년이 교주 면담을 요구하고 일제 경찰에 고발하면서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경찰은 8개월에 걸쳐 전용해의 은신처와 전국 각처의 백백교 비밀장소에서 시체 346구를 발굴했다. 
1937년, 사건이 드러나면서 당시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충격을 가져왔고 일본은 물론 중국과 미국을 거쳐 전 세계에 이 사이비종교의 횡포가 알려졌다. 1941년 1월에 마무리된 백백교사건 선고 공판에서는 혼자서 170명을 죽인 김서진, 167명을 죽인 이경득, 127명을 죽인 문봉조 등 간부급 살인마들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나머지 10여 명에게는 징역형이 선고되면서 346명을 살해한 희대의 살인마 사교 사건은 막을 내렸다.
교주 전용해는 수사망을 피해 도주하다가 1937년 4월 7일 경기도 양평 용문산에서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일제는 전용해의 시신을 거둬 범죄 연구용으로 삼기 위해 머리를 잘라서 포르말린 용액 속에 넣어 보관했다. 광복 후 국과수로 전해오다 ‘문화재제자리 찾기’의 사무총장 혜문 승려 등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한다며 국가를 상대로 폐기를 요구해, 전용해의 머리는 2011년 10월 화장 처리되었다. 우리나라의 극단적 사이비종교의 시작은 이 백백교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용화교 사건

용화교(龍華敎)는 1960년대에 여자 신도 강간과 금품갈취 등으로 문제를 일으킨 사이비종교다. 서백일(1888∼1966)이라는 자가 광복 즈음에 창시했고, 1955년 김제시 모악산에 용화사(龍華寺)란 절을 짓고 본부로 삼아 정착했다. 그는 자신이 미륵에게 사람들을 인도하는 자라고 주장했다. 
교주 서백일은 여자들을 출가하게 해 여수좌(女首座)라 불렀는데, 이 여수좌들은 사실상 서백일의 첩으로 그 숫자가 5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는 천지개벽이 일어나면 미륵이 강림하고 세상에 큰 재앙이 닥치는데, 그때가 되면 용화사 주변에 와야 안전하며 모악산 일대가 전 세계의 수도가 된다고 말했다. 
1962년, 여수좌 2명이 서백일을 고소해 당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서백일은 1년6개월 형을 선고받았으나 건강상 이유로 10개월만 복역하고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았다. 형집행정지 중에도 여전히 범행을 계속하던 그는 1966년, 과거 신도였던 20대 청년 소윤하의 칼에 찔려 죽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소윤하는 교주에게 자기 누나와 여동생이 당했으므로 참을 수 없어서 죽였다고 한다. 
1987년 오대양 집단자살사건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은 사이비종교에서 운영하던 회사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1987년 8월 29일에 경기도 용인군(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북리 오대양 공예품 공장에서 발생한 집단 자살 사건이다. 공장 내 식당 천장에서 오대양 대표 박순자와 가족, 종업원 등 추종자 32명이 집단 자살한 시체로 발견됨으로써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남자 4구, 여자 28구. 손이 묶이거나 목이 졸린 사체 등 자살과 타살 정황이 뒤섞인 상태였다. 

1992년 ‘휴거’ 소동 

1992년 10월 28일, 바로 ‘휴거’의 날이었다.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라’에서 ‘다’와 ‘미’를 딴 다미선교회에서 지구 종말이 닥치며, 이를 믿는 자들은 하늘로 들림을 받는 ‘휴거’를 경험하게 된다고 선언한 날이었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1999년 7월보다 7년 먼저 일어난다고 예고된 이 종말론에 수많은 사람이 빠져들었다. 
멀쩡한 회사원이 전 가족을 데리고 잠적하는가 하면 종말론 교회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부모를 원망하며 음독자살한 여학생도 있었다. 전 재산을 팔거나 재산의 태반을 매각해 교회에 바치고 10월 28일까지만 연명할 재산을 들고 기도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전국적으로 따지면 수천 명에 달했고 해외지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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