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대 예술대 문창과, 미술과 졸업. 2001년 문학21로 등단
· 시집 : 섬진강에 보내는 편지 외 다수 · 현 한국예조문학회장
주막(酒幕)에서
-김용호(金容浩)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길 옆
주막
그
수없이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나도 입술을 댄다.
흡사
정처럼 옮아 오는
막걸리 맛
여기
대대로 슬픈 노정(路程)이 집산하고
알맞은 자리, 저만치
위엄 있는 송덕비(頌德碑) 위로
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가고······
세월이여!
소금보다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여
주막을 나서면,
노을 비낀 길은
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내 입술이 닿은 그런 사발에
누가 또한 닿으랴
이런 무렵에.
주막은 늘 길옆에 있었다. 되도록 오가는 길들이 만나는 삼거리나 아니면 강나루 곁이다.
그곳은 목마를 때 허기질 때 막걸리 한잔하고 다시 떠나는 나그네들의 쉼터였다.
“주모, 여기 막걸리 한 사발 주소” 하면, 개다리소반 위에 김치 한 접시와 막걸리 한 병이 올려져 왔다. 단숨에 쭈욱∼ 한 사발 마시고 입가 수염에 묻은 막걸리 흔적을 쓱 닦아낸 뒤 하늘 한번 보고, 강물 한 번 보고, 가야 할 길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 길 떠나면 ‘바로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가 된다. 한없는 길 인생의 로정에서 주막은 언제나 이정표가 되어 나그네들을 손짓했고, 그때 우리 강산 어디쯤 있는 주막을 시인도 가서 이 빠진 막사발에 막걸리 한 잔을 담아 입술을 대고 보니 수많은 나그네의 스쳐 간 입술들이 생각나고, 소금보다 짜다는 인생살이를 안주 삼아 마시다 보니, 정과 정이 이어져 오는 그 막걸리 맛에 많은 회한이 서렸을 것이다. 그 맛은 대대로 슬픈 로정(路程) 집신하고 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간 뒤에 만나는, 주막만이 가질 수있는 정경이다. 그렇게 주막을 찾아왔지만, 막걸리 한잔을 마시면 나그네들은 바람같이 떠나갔다.
떠나는 길에 위엄있는 송덕비 하나를 바라보면서 내 뒤에 올 나그네들을 떠올리니 우리가 걷고 있는 산산한 삶이 새삼 덧없음을 느끼게 해준다.
듣기로는 남쪽 어느 강가에 이런 주막이 하나 있다는 데 가보지는 못했고, 몇 년 전에 종로 3가 어느 주점에 걸려있는 <주막에서> 이 시를 만났다. 이 시를 바라보며 막걸리 한잔을 마시고 나니 그곳에 온 사람들이 모두 나그네인듯해서 아직도 그 주막은 사라지지 않고 건재하고 있음을 알았다.
■ 김용호(1912~1973) 경남 마산 출생
· 1938년 첫 시집 <낙동강>을 펴내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함
· 시집으로는 <향연> <부동항> 서사시 <남해찬가> 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