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현대사(20) 1974년(2) '별들의 고향'과 청년문화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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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현대사(20) 1974년(2) '별들의 고향'과 청년문화 논쟁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3.11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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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와 함께 살펴본 20세기 후반의 한국사회(20)

<가는 세월>과 <홀로 아리랑>을 부른 서유석은 20대 후반이던 1973년에 동아방송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진행하며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학살을 다룬 <추악한 미국인>이란 책을 읽었다. 이후 서유석은 대중들의 시야에서 오랫동안 사라졌다. 사회적 메시지가 약간만 있거나 퇴폐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는 경우 유신의 철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데 예술작품에 대한 통제와 검열이 극에 달했던 1974년과 1975년에는 역설적이게도 1970년대를 대표하는 영화가 쏟아져 나온다. 1974년과 이듬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영화 <별들의 고향>과 <영자의 전성시대> 모두 호스티스가 주인공이었다. 

▲영화 (별들의 고향) 포스터.
▲영화 '별들의 고향' 포스터.

 

영화 <별들의 고향>

최인호가 쓴 소설 <별들의 고향>은 1972년 9월 5일부터 다음해 9월 14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되며 크게 인기를 끌었다. 한 젊은 여성의 성적 편력을 통해 1970년대 한국 사회가 지닌 산업화 과정의 병폐, 참된 사랑이 빠진 인간소외 문제를 신선한 문장과 날카로운 감성으로 형상화한 소설이다. 
1974년에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장호 감독이 만들고 신성일ㆍ안인숙이 주연한 <별들의 고향>은 4월 26일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해 105일간 장기상영하며 단일관에서만 46만 명을 동원한다. 고등학교 때 이미 신춘문예에 입선한 최인호는 일약 스타 반열에 오르지만, 훗날 그는 한 인터뷰에서 “체제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에게는 상업주의라는 비난을 받았고, 체제를 수호하려는 이들에게는 퇴폐주의라는 양날의 협공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영화 속 주인공 경아는 네 명의 사내를 만나면서 부서져간다. 감상적이고 슬픈 문장들. 반짝거리면서 희미해져 가는 운명. 한때 명랑한 여자였던 경아는 사랑과 삶에 절망해 눈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정성일 영화평론가는 이 영화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영화 <별들의 고향>은 (소설 원작을) 베껴 쓰듯이 찍은 영화다. 이 영화는 감정으로 가득 찬 영화다. 그런데 그 감정이 마치 시대정신처럼 우울한 멜랑콜리가 되어 경아를, 경아의 몸을, 경아의 대사를 갉아먹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고작 신파에 지나지 않은 이 영화의 줄거리가 이 세상에 실현된 저승처럼 비애의 알레고리가 되었다. 경아는 눈 쌓인 강가에서 죽어간다. 그러면서 속삭이듯이 말한다. ‘선생님, 추워요.’ 그냥 들으면 간지러운 이 한마디가 1974년에는 희망 없는 구조를 요청하는 가련하고 결사적인 유언이 되었다. 경아는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이듬해 유신헌법이 재차 국민투표에 부쳐져 통과됐다.” 
음악은 가수 이장희가 맡았다. 이장희가 노래한 <한잔의 추억>과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비롯해 당시 17살이었던 윤시내가 불렀던 <나는 열아홉 살이예요> 등 영화 속 음악들도 모두 크게 히트했다.

청년문화 논쟁

1970년대 중반의 청년문화는 흔히 ‘통ㆍ블ㆍ생’ 문화로 불렸다. 통기타, 블루진(청바지), 생맥주가 청년문화를 상징한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1974년에 벌어진 ‘청년문화 논쟁’은 광복 75년 동안 진행된 문화논쟁 중 가장 큰 논란을 빚은 것이었다.
문학평론가이자 동아일보 기자였던 김병익이 <오늘날의 젊은 우상들>이란 특집기사를 <동아일보> 1974년 3월 29일치에 쓰면서부터 논쟁은 시작되었다. 이 기사는 당시 대중들의 관심이 높았던 최인호(소설가), 이장희ㆍ양희은ㆍ김민기(이상 가수), 서봉수(바둑기사), 이상룡(개그맨) 등 6명을 젊은 우상으로 선정했다. 이들의 대표자 격인 소설가 최인호는 1945년생이니 당시 스물아홉 살이었고, 코미디언 이상룡은 1944년생이니 서른 살이었다. 20대 청년들이 새로운 우상으로 급부상했고, 이들의 활동과 문화를 놓고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6명의 대중적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기에 신문과 방송은 청년문화에 대한 호의적인 보도들을 연달아 내놓았다. 
청년문화에 대한 비판은 대학에서부터 나왔다. 서울대 학생들의 신문인 ‘대학신문’은 청년문화를 한낱 말초적 신경을 자극하는 퇴폐 문화, ‘빠다에 버무린 깍두기’와도 같은 현상에 불과하다고 평가 절하했다. ‘대학신문’은 암울한 현실을 주목해 청년들에게 진취적인 태도와 투철한 민족주의를 가질 것을 요구했다. 
청년문화에 대한 논쟁은 봄을 뜨겁게 달군 다음 여름이 되어 이내 식어버렸다. 유신 치하의 엄혹한 분위기와 청년문화에 관한 학술적 연구의 부재, 제한된 언론 자유의 현실이 논쟁을 맥 빠지게 했다. 
대중문화평론가들은 청년문화의 출현을 ‘처음으로 세대 분리가 일어난 현상’이라고 진단한다. 청년문화가 당대의 기성세대와 사회에 대한 젊은 세대의 반감에 기반을 둔 것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청년문화는 형식의 파괴를 넘어서 기성 문법과 관행에 맞서는 새로운 의식과 가치관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게다가 정치적이거나 이념적인 저항의식을 구체적으로 가졌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1970년대 중반의 청년문화는 정치적 저항의 의미보다는 기성세대와의 차이를 드러내는 구별짓기 의미를 더 많이 가진 것이었다고 평가된다. 

▲가수 박인희.

 

박인희와 <목마와 숙녀>

‘노래하는 시인’으로 불렸던 박인희는 1970년 이필원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혼성 포크듀엣 ‘뚜아에무아’를 결성해 활동하며 <약속>ㆍ<그리운 사람끼리>ㆍ<세월이 가면>(리메이크곳) 등의 노래로 젊은이들에게 듬뿍 사랑받았다. 듀엣 해체 후에는 ‘3시의 다이얼’이란 라디오 프로그램의 디스크자키(DJ)를 맡으며 가수에서 진행자로 방향을 선회했다. 
솔로 가수로 활동할 생각이 없었던 박인희는 작사가 박건호가 노랫말을 쓴 <모닥불>로 1972년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이후 <하얀 조가비>ㆍ<물 긷는 여인>ㆍ<봄이 오는 길>ㆍ<끝이 없는 길> 등 주옥같은 노래를 발표했다. 1981년에 가요계를 떠나 미국에서 방송 활동을 하다 35년만인 지난 2016년 귀국했다.
그녀의 매력은 문학적 낭만과 맑은 목소리다. 인생과 사랑 이야기를 쉬운 어휘로 속삭이듯 노래했다. 1976년까지 7장의 앨범을 발표했는데 그중 한 장은 시 낭송 음반이었다. 시 낭송 음반 중 크게 사랑받은 작품으로는 자작시 <얼굴>과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가 있다.
<목마와 숙녀>는 1950년대 후기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시인 박인환의 대표작이다. 6ㆍ25 전쟁 직후의 상실감과 허무 의식을 드러낸 시로, 떠나가는 모든 것에 대한 절망감과 비애를 노래했다.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로 시작하는 이 작품의 감상적(感傷的) 분위기는 이 시를 알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에게 종이 위의 활자로서보다는, 그 시어들만큼이나 감상적인 배경음악(김기웅 작곡)과 거기 실린 박인희의 목소리로 기억되었다. <목마와 숙녀>는 1970년대 중반 그 시절, 박인희의 낭송 시로 그렇게 젊은이들의 가슴속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박인희 낭송 시는 서른에 요절한 박인환 시인의 존재를 대중들에게 널리 각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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