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29) ‘김영’(김웅) …분단 사슬 묶인 비운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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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29) ‘김영’(김웅) …분단 사슬 묶인 비운의 시인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3.18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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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열전 (29)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금기시되던 빨치산은 소설 <태백산맥>과 <남부군>으로 그 실상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중 <남부군>은 이른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라북도당이 회문산으로 들어가면서부터의 생활상을 그린 실화소설이다. 1990년에는 이 소설을 토대로 만든 영화 <남부군>이 서울 관객 37만을 동원하며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안성기, 최진실, 최민수 등이 출연했다. 주인공 이태 역은 안성기가 맡았으며, 인상적인 연기를 보였던 배우 최민수의 역할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문학청년이자 휴머니스트 ‘김영’(김웅)이다.
 

▲1970년 물레방아 글모임 지도교사 시절의 김영.《순창문학》제공.

 

‘줄곧 1등’ 영특한 어린 시절

김영(金英ㆍ1929∼1995)은 1929년 순창읍 옥천동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웅(金雄)이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간호사와 행상을 하며 김웅을 키웠다. 순창공립보통학교(현재 순창초등학교)에 입학해 6학년까지 모두 ‘갑(甲)’을 맞았고, 순창중ㆍ순창농림학교(현재 순창제일고)에 수석으로 입학하여 줄곧 1등을 차지해 수재로 불렸다. 고등학교 시절인 1948년 2월,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와 친일교사 축출을 외치며 동맹휴학을 주도, 5일간 피검되기도 했다. 1949년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 국문과에 수석 입학해, 소설가 염상섭ㆍ이무영에게 창작법을 강의받고 임화ㆍ김기림ㆍ정지용 등에게 심취하며 시인의 꿈을 키웠다.

회문산에 입산한 휴머니스트

대학 1학년 재학 중에 6ㆍ25 전쟁이 발발하자 고향 순창에 내려오게 된다. 8월 15일부터 좌익계 전국문학예술총동맹 순창군지부 서기장을 맡아 연극공연과 시 낭송을 주도하며 순회공연에 나섰다. 미군의 인천상륙작전(9월 15일)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9월 28일 인민군이 대패한 후 미군들이 순창 땅으로 들어오던 날 밤, 남은 좌익 운동가들과 산간지역 주민 등 300여 명 속에 끼어 회문산으로 입산한다. 
김웅은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맞아 죽는’ 빨치산을 선택한 이유를 1990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대부분 사람들은 특정 이념을 가진 무슨 주의자가 아니었다. 사회주의에 대해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고 그때를 기억하면서 “김구, 여운형 같은 민족지도자들이 암살당하고 이승만 정권의 비리와 부패에 대한 반감이 너무 컸던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김웅은 회문산에서 전북유격대 ‘독수리병단’의 성원으로 있을 때인 1950년 10월 하순, 소설 <남부군>의 저자 이태(본명 이우태)를 처음 만나게 된다. 김웅은 병단 기술서기(서무격)였고 이태는 전투부대 하급 간부였다. 
어느 날 격전 끝에 군경 포로 몇을 잡았는데 황이라는 문화부 중대장이 이들을 처단하면서 전사들을 일일이 지명해서 찔러 총을 시켰다. 이때 김웅은 “나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까닭 없이 살상을 할 수 없다”며 그 명령을 단호히 거부했다. 당시 간부에게는 즉결처분이 허용돼 있었기 때문에, 중대장 황은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김웅을 권총으로 사살할 수도 있었다. 다행히 소설 <남부군>의 저자 이태의 개입으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김웅에게 시(詩)는 힘의 원천이며 현실과 꿈을 잇는 가교였다. 극한 상황에서도 배낭 속에 항상 연필과 메모지를 넣고 다니며 시를 썼다. 그 무렵 시재를 인정받아 정치부에서 문화사업을 하라는 추천을 받았으나 그는 일개 전사로 싸우는 것이 더 보람 있다며 이를 거절했다. 김웅의 의지는 그렇게 강했지만, 그의 작은 체구는 거기 걸맞게 강인하질 못했다. 1952년 3월 초, 눈 깊은 지리산 마천면 백무골 골짜기에서 중병을 앓고 대열에서 떨어져 버렸고, 동지 4명과 나흘을 굶은 채 눈을 끓여 먹고 있다가 토벌대에게 붙잡힌다. 

교도소 출소 후 순창 생활

당시 22세였던 김웅은 체포되어 광주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 20년으로 감형을 받았다. 1958년에 전향서를 쓰고 1964년 마산교도소에서 폐결핵과 여러 질병의 합병증으로 가석방되어 출소했고, 그해 14세 연하와 결혼했다.
출소 후 고향에 내려와 창작과 교육자의 길을 걷고 싶어서 순창고등학교 영어교사로 부임했지만, 과거 전력 때문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순창읍 옥천교 다리 옆에서 비닐하우스 시설 채소를 경작했다. 농사를 지으면서 선산곡 작가 등 고향 문학청년들과 ‘물레방아 글모임’이라는 문학단체를 결성해 작품집 발간과 시화전 등 문학 발전에 열정을 보였다. 하지만 고향에 내려온 지 10년 만에 빚더미에 앉고 말았고, 1978년 무일푼으로 부인과 1남 3녀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간다. 영등포 도림동 등에서 손수레(리어카)를 끌고 고물 장사부터 야채장사, 과일장사,  풀빵장사를 하며 궁핍하게 살았다.
<남부군> 저자 이태와 재회

<남부군> 저자 이태는 월간 《신동아》에 실린 <벽과 인간>을 보고 김웅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약 10년의 세월이 흐른 후인 1977년 여름(약 25년 만에), 어렵사리 수소문해 김웅이 살고 있던 순창읍 옥천동 집을 찾아 해후한 바 있다. 
이태는 <남부군>에서 김웅에게 사인(sign)을 보내는 기분으로 그에 관한 얘기를 적어 넣었다고 한다. 이때 이태는 김웅이 입을지도 모르는 불이익을 고려해서 비슷한 음의 ‘김영’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얼마 후 김웅에게 조심스럽게 전화가 걸려왔고, 두 사람은 해후하게 된다.
1988년 소설 <남부군>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1990년에 영화까지 상영되자 거기 등장하는 시인 ‘김영’의 이름도 세상에 알려졌다. 출판사들이 앞다투어 그의 천막 가게를 찾았다. 그는 ‘김영’이라는 필명으로 시집 <깃발 없이 가자>, <리아카의 시인> 그리고 자전적 수기 <총과 백합>, <빨치산 철창 수첩>을 잇달아 펴냈다. 
<깃발 없이 가자>(1988)는 김영의 첫 번째 시집으로, 자전적 삶의 이야기다. 분단의 비극을 직접 감내해 온 삶의 아픔과 분단에 대한 처절한 통한의 내용을 담고 있다. 수록된 시들은 총소리 요란한 전쟁터에서 피 묻은 수첩에 기록한 작품이거나 감방에서 대젓가락 끝으로 휴지조각에 쓴 시다. 
‘단 한 번만이라도’ 꽃필 날을 기다린 시인

말년의 김웅은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삶을 예견한 것처럼 정열적으로 집필 생활을 했다. 그러나 경제적인 고통과 함께 녹내장으로 인한 시력 장애가 그를 괴롭혔다. 확대경을 사용해도 글씨를 읽을 수 없게 되자, 딸과 아들에게 책을 읽게 해서 듣고 대필을 시키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해가며 펜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그에 대한 출판사들의 관심도 식어갔지만, 문학에 대한 그의 집념은 꺾이지 않았다. 1994년 여름 계간지 《역사비평》으로부터 월북시인 임화에 관한 원고 청탁을 받고 원고의 절반가량을 썼을 즈음인 1995년 9월 29일, 홀연히 세상을 떴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시립묘지에 안장되었다.
2002년 ‘제1회 빨치산 시인 김영 시인 추모 백일장대회’가 한국문인협회 순창지부 주관으로 개최되었으나 1회 행사에 그치고 말았다. 고향에서조차 설 자리가 없었던 그는 자신의 시 <음지>(-한번쯤은)에서 “육십 평생에 한 번쯤은 내 고목에도 꽃필 날이 있을까”라고 절규했다. 분단의 사슬에 묶여 살아온 그는 자신의 사상에 대해 혹독한 값을 치렀고, 그리고 전향했다. 김웅(김영)의 유언은 “나를 분단 시대의 마지막 희생양이라 불러 달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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