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우리역사(9) 고구려 대무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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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우리역사(9) 고구려 대무신왕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4.08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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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첫 공격 … 역전된 고구려와 부여

고구려 제3대 왕 대무신왕(대해주류왕)은 고구려가 빠르게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햇다. 추모왕(주몽)의 손자이자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고, 낙랑공주에게 자명고를 찢게해 낙랑국을 정복한 호동왕자의 아버지이다. 
지난 2006∼2007년에 문화방송(MBC)에서 방영해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주몽>에서는 주몽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대소왕자의 부여군과 싸워 연전연승을 거두지만 역사적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고구려와 부여는 주몽 때는 충돌이 없었지만, 금와왕이 죽고 대소가 부여왕이 되자 양국 사이에 전투가 자주 벌어졌다. <삼국사기>를 보면 유리왕 때까지는 고구려보다 부여의 군사력이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가 부여를 선제공격한 것은 대무신왕 때가 최초다. 
서기 20년, 부여에서 어떤 사람이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붉은 까마귀’를 얻어 부여왕 대소에게 바쳤다. 이때 한 신하가 말했다. “까마귀는 본래 검은 것인데 지금 변해서 붉은색이 되었습니다. 또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니 두 나라를 아우를 징조입니다. 왕께서 고구려를 차지할 것입니다.” 이에 부여왕 대소는 기뻐하며, 그 까마귀를 고구려에 보냈다. 
그해 10월, 부여로부터 선물 받은 까마귀를 놓고 고구려 대무신왕이 여러 신하와 의논했다. 한 신하가 “검은 것은 북방의 색인데 지금 변해서 남방의 색이 되었습니다. 또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물건인데 부여왕이 얻어서 갖지 않고 우리에게 보내었으니 양국의 존망은 아직 알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대무신왕 4년(서기 21) 12월, 부여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동원했다. 고구려군이 비류수 가에 다다랐을 때 한 여인이 솥을 들고 노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여인은 사라지고 솥만 있었다. 그 솥으로 밥을 짓게 하자 불을 피우지 않고도 스스로 열을 내 밥이 지어지므로, 군사를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이때 한 남자가 나타났다. “이 솥은 우리 집 물건입니다. 제 누이가 잃은 것을 지금 대왕께서 찾았으니, 제가 솥을 지고 따르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에 대무신왕은 그에게 부정(負鼎ㆍ솥을 짊)이라는 성을 내려 주었다.
이물림(利勿林)에 이르렀을 때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키는 9척이고 얼굴은 희며 눈에 광채가 있었다. 그가 왕에게 절하며 말했다. “신은 북명(北溟) 사람 괴유(怪由)라고 합니다. 듣건대 대왕께서 부여를 정벌하신다고 하니, 신이 따라가서 부여왕의 머리를 베어 오겠습니다.” 이에 왕은 기뻐하며 허락했다. 이후 또 어떤 사람이 나타나 말했다. “신은 적곡(赤谷) 사람 마로(麻盧)입니다. 전투에 참여하기를 청합니다.” 왕은 이번에도 허락했다.
다음 해 2월, 부여 대소왕은 북진 중인 고구려를 기습하려고 많은 군사를 이끌고 말을 채찍질했다. 그런데 부여 남쪽 지역은 진흙이 많았다. 부여군은 진창에 빠져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었다. 대무신왕은 군사들에게 대대적인 공격을 명령했고, 부여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갔다. 이때 괴유가 전진해, 부여 대소왕을 붙잡아 머리를 베었다. 고구려로서는 시조 추모왕(주몽)을 왕자 시절부터 괴롭힌 철천지원수 대소를 제거하는 큰 전과를 올린 것이다. 
부여 군사들은 왕을 잃었지만, 고구려군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며 끝까지 저항했다. 대무신왕은 군량마저 떨어져 군사들이 굶주리므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하늘을 향해 영험을 빌었다. 홀연히 큰 안개가 피어나, 7일 동안이나 지척 간에 사람을 분간할 수 없었다. 고구려군은 안개가 자욱이 낀 밤을 이용해 간신히 빠져나왔다. 
대무신왕은 궁궐에 도착해 “부여를 공격해 왕은 죽였으나 나라를 멸하지 못했다. 게다가 우리 군사들과 물자를 많이 잃었으니 모두 내 잘못이다”라고 말하고 친히 죽은 자를 조문하고 아픈 자를 위문하여 백성들을 위로했다. 대소왕을 참살한 부여 공격의 효과는 컸다. 그해 7월, 부여 왕의 사촌 동생이 만여 명이나 되는 백성들을 데리고 투항해 왔다.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정벌할 때 출현한 부정ㆍ괴유ㆍ마로 등 3인은 무력 기반을 제공한 가신(家臣)적 성격을 갖는 인물들이다. 앞서 주몽이 부여에서 남하할 때도 3인(오이ㆍ마리ㆍ협보)의 세력을 받아들였으며, 유리왕도 부여에서 남하하면서 3인(옥지ㆍ구추ㆍ도조)의 가신을 이끌었다. 고구려 건국 초기에는 관등제도가 마련되지 않았기에, 성씨를 하사함으로써 신료로 편입하는 방식을 취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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