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현대사(22) 1976∼79년의 대중음악, 긴 불황-새로운 시도
상태바
가요현대사(22) 1976∼79년의 대중음악, 긴 불황-새로운 시도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4.08 19: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중가요와 함께 살펴본 20세기 후반의 한국사회(22)

 1976년 3월 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문익환ㆍ윤보선ㆍ김대중ㆍ함석헌ㆍ이우정ㆍ이문영 등 20명 재야인사가 유신독재 정권 종식을 촉구하는 3ㆍ1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다. 선언문 내용은 긴급조치 철폐, 언론ㆍ출판ㆍ집회의 자유, 대통령직선제 요구, 사법권 독립 등이었다. 사건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서명자 중에 김대중의 이름을 발견하고 ‘엄벌’을 지시했고, 정부는 김대중 등 11명을 긴급조치9호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재판정 피고석에는 전직 대통령, 대통령 후보, 재야 원로, 성직자 등 당대의 기라성같은 명망가들로 가득했다. 이들은 정연한 논리와 달변으로 유신체제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재판정이 민주주의 강연장으로 변모하자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민주학교’라 불렀다. 박정희는 이 사건을 민주화운동 세력에 위해를 가하는 본보기로 삼고자 했지만 3ㆍ1선언은 유신체제로 인해 얼어붙은 산하를 깨우는 새벽 종소리가 되었다. 재야인사와 종교계 인사, 학생운동권은 거대한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이들은 1979년 부마항쟁에 이르기까지 유신정권과 맞서 싸우는 항쟁의 주체로 우뚝 서게 된다.

 

대중음악계 불황과 트로트 왕정 복고

1975년에 있었던 금지곡 조치와 대마초 파동은 한국 대중문화계 전반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대중음악은 불황의 긴 터널에 빠진다.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1976년 판매량 1만장을 넘긴 음반이 10종에 불과하고 그해 최고 히트작이었던 송대관의 <해뜰날> 음반 판매고조차도 고작 2만장에 지나지 않았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런 불황은 유신정권 기간 내내 계속되었다. 텔레비전 방송도 “시청자들로부터 ‘항상 같은 얼굴에 같은 내용으로 재미없고 시시하다’는 냉담한 반응을 얻고 있다”라는 기사가 눈에 띈다. 
1976년 하반기부터는 생존이 어려워진 그룹사운드 출신 가수들이 ‘순화’된 복장으로 브라운관에 귀순한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조용필)ㆍ<오동잎>(최헌)ㆍ<사랑만은 않겠어요>(윤수일)ㆍ<나를 두고 아리랑>(김훈) 등의 ‘트로트고고’ 곡들이 유행하며 트로트의 ‘왕정복고’가 전격적으로 단행된 것이다. 트로트가 만든 왕정복고는 창의적인 측면과 예술적 완성도 측면에서 한국 대중음악을 일순간에 후퇴시켰지만, 이들은 1970년대 말까지 혜은이ㆍ이은하ㆍ윤시내 등의 여가수들과 더불어 정상의 인기를 누렸다. 

대학가요제 

‘순수ㆍ열정ㆍ창의’라는 핵심어(키워드)로 당시 젊은이들의 정서를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스타 산실로 자리했던 대학가요제. 1977년 문화방송(MBC)이 주최한 ‘대학가요제’는 처음 대학생들의 아마추어 경연대회로 출발했지만 신선한 노래와 얼굴들이 잇달아 등장,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꿨다. 방송국마다 경쟁적으로 대회를 개최해 ‘해변가요제’(이후 ‘젊은이의 가요제’), ‘강변가요제’ 등도 생겨났다. 
제1회 대상을 수상한 샌드페블스의 <나 어떡해>는 캠퍼스 그룹사운드 붐으로 이어졌다. ‘대학가요제’ㆍ‘해변가요제’ㆍ‘강변가요제’는 스타 등용문으로 각광받았고, <탈춤>ㆍ<그때 그 사람>ㆍ<꿈의 대화> 등 수많은 노래가 가요계에 새바람을 몰고 왔다. 그러나 시대 변화와 함께 젊은이다운 창의성 부재, 기존 가요 모방 등 지나친 상업화에 대한 비판이 일었고 여러 이유로 폐지되었다가 2014년에 부활되었다.

▲제1회 대학가요제

산울림 <아니 벌써> ‘젊은 한국음악’

 

▲산울림 1집 앨범.

김창완ㆍ창훈ㆍ창익으로 결성된 3형제 그룹 산울림이 대마초 파동으로 된서리를 맞은 가요계를 바꿀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벌써 해가 솟았나/ 창문 밖이 환하게 밝았네∼” 1977년 12월에 발표된 데뷔곡 <아니 벌써>는 감수성과 실험성이 듬뿍 밴 사운드와 동요 같은 노랫말, 아이가 크레파스로 그린 듯한 앨범 재킷까지 참신함이 넘쳤다. 앨범이 발표되자 ‘괴상한 음악이 나왔다’는 대중의 반응 속에 단 20일 만에 돌풍으로 이어졌다. 사랑이나 이별 얘기도 없는 노래로 주류 음악시장을 단숨에 평정한 것은 전혀 없는 일이었다. 
산울림의 리더인 김창완은 1930년대 이래 한국 대중음악의 형식이었던 2박자 단위의 4음보 율격이나, 서구 음악의 강박 관념 속에 거의 일방적으로 수용된 4박자 8비트의 규칙에도 구속되지 않았다. 이어진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ㆍ<빨간 풍선>ㆍ<개구쟁이>ㆍ<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등의 노래는 1970년대 후반 암흑기에 ‘문화적 산소’를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나아가 1980년대 전반 한국 대중음악의 전성시대를 여는 일익을 담당했다. 

정태춘, 노래하는 시인이자 투사

정태춘은 치열한 현실 인식과 뜨거운 작가 정신, 토속적 정서에 뿌리를 둔 서정성을 구현한 아름다운 작품, 음반 사전 심의 철폐 운동 등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굵은 업적을 남긴 한국 포크의 거장이다. 1978년에 발매된 정태춘의 데뷔 음반에 담긴 <시인의 마을>ㆍ<촛불>ㆍ<서해에서> 등은 서정성 짙은 명품 포크송이었다.
부인인 박은옥은 공식 데뷔 이전에 부산 등 다운타운에서 통기타 가수로 활동했다. 데뷔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정태춘이 만든 곡만 노래해온 그녀는 1집을 통해 <회상>ㆍ<윙윙윙> 등을 히트시키며 존재감을 얻었다. 정태춘은 일부 수록곡에서 화음을 맡아 훗날의 환상적인 듀엣 작업을 예고했다. 두 사람은 1980년 5월 결혼했다. 
데뷔 음반부터 가해진 노랫말에 대한 ‘공륜의 심의보류 조치’는 정태춘의 창작욕을 옥죄었다. 이에 인기에 연연하기보다는 자신만의 음악을 구축하기 위한 탐구와 시도에 더욱 몰입했다. 2집(1980)과 3집(1982)에서는 노래하는 시인이 되고자 했던 자신만의 음악적 색채 찾기를 탐구했고, 국악과 양악의 음악적 상관관계에 대한 실험도 시도했다. 그러나 의미심장한 작품의 상업적 대가는 처참했다. 
정태춘은 이후 서정과 서사를 넘나들며 부당한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지닌 노래로 변화한다. <아 대한민국>(7집), <92년 장마, 종로에서>(8집),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10집)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1993년 사전 심의를 거부하고 발매한 8집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서사와 서정을 합체한 민중가요의 새로운 음악어법을 제시한 이들 부부의 최대 명반이다. ‘창작ㆍ표현의 자유 만세’라는 붉은 스티커를 찍은 이 엘피(LP) 재킷의 구호는 음반 사전 심의 철폐에 관한 관심을 환기했다. 
1980년대 이후 안치환이나 권진원처럼 민중가요 영역에서 입지를 굳혀 기존가요로 진출을 시도한 예는 더러 있지만 촉망받는 기성 가요계의 신인이었다가 노래하는 투사로 방향을 전환한 이는 정태춘이 유일하다. 음악적 맥락에서 보더라도 정태춘은 최고 수준의 가수 중 한 명으로 손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정제된 시적인 가사를 읊조리거나 푸념하듯이, 담담하게 소화하는 그의 가창력은 감수성을 담아낸다는 측면에서는 거의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다.

▲정태춘ㆍ박은옥 공연 모습
▲정태춘ㆍ박은옥 공연 모습


※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대중가요와 함께 살펴본 20세기 후반의 한국사회>를 마칩니다. 4월 23일부터는 새 기획물을 시작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금과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식 4월 21일 개최
  • 우영자-피터 오-풍산초 학생들 이색 미술 수업
  • “조합장 해임 징계 의결” 촉구, 순정축협 대의원 성명
  • 순창군청 여자 소프트테니스팀 ‘리코’, 회장기 단식 우승
  • [열린순창 보도 후]'6시 내고향', '아침마당' 출연
  • 재경순창군향우회 총무단 정기총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