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우리역사(10) 고구려 제5대 모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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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우리역사(10) 고구려 제5대 모본왕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4.28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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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정변 첫 ‘희생양’

고구려는 시조 추모왕(주몽), 제2대 유리명왕(유리왕), 제3대 대무신왕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 동안 주변 소국들을 정복ㆍ통합하면서 국가의 기틀을 다져갔다. 하지만, 그 사이에 유리왕이 태자 도절(都切)과 해명(解明)을 차례로 죽였고, 그 뒤 왕위를 이은 대무신왕도 낙랑국 정복 직후 호동왕자를 자살로 내모는 비극적 사건이 벌어졌다. 뿐만아니라 신하가 왕을 시해하는 일도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서기 53년 11월에 모본 사람 두로(杜魯)가 제5대 모본왕(慕本王)을 시해한 사건이다.

모본 출신 신하에게 살해 당한 모본왕 

대무신왕은 낙랑공주를 꼬드겨 자명고를 찢은 호동이 자결하고 나자 후사가 막막했다. 호동왕자를 자결케 한 원비(元妃ㆍ제1 왕후)가 낳은 아들 해우(解憂)가 있었지만, 너무 어려 왕위를 동생에게 물려 줬다. 제4대왕 민중왕(閔中王ㆍ재위 44년~48년)은 양심적인 왕이었다. 조카 해우를 태자에 봉해 왕위를 물려줬다. 
태자 해우가 민중왕에 이어 고구려 제5대 모본왕(慕本王ㆍ재위 48년~53년 음력 11월)이 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는 처음에는 외치와 내치에 힘썼지만, 친모인 원비의 성격을 닮아 사람됨이 사납고 어질지 못했다. 폭정은 날로 심해져 주변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다. 앉을 때는 엉덩이로 사람을 깔아뭉갰으며, 누울 때도 사람을 베개로 삼을 정도였다. 엉덩이 밑에 깔린 사람이나 머릿밑에 베개 대용으로 쓰인 사람이 조금만 움직여도 그들을 즉살했다. 바른말 하는 충직한 신하들까지 직접 화살로 쏘아 죽였다.
당시 왕의 측근에서 시중을 들던 모본 지방 출신 관리 두로(杜魯)는 자신도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몰라 신세를 한탄하며 울고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이런 말로 사주했다. “대장부가 어찌 아녀자처럼 그리 쉽게 우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나를 위무하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라고 했다네. 지금 임금은 포악하게 사람을 마구 죽이니 이는 백성의 원수요, 결코 임금다운 임금이라고 할 수가 없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그대가 왕을 죽여 없애면 그야말로 백성의 원수를 죽여 없앤 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두로는 이 말을 듣고 칼을 품속에 감추고 왕에게 다가가 칼을 뽑아 왕을 죽였다. 신하들은 죽은 왕을 모본 언덕에 장사지내고, 모본왕이라 했다.
이것이 역사에 기록된 고구려의 첫 정변인 서기 53년 모본 지방 출신 관리인 두로의 모본왕 처단 사건이다. 

모본왕은 정말 폭군이었을까? 

모본왕은 포악한 왕으로 알려졌지만, 정변을 일으킨 사람들에 의해 왜곡된 모습일 수도 있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기록을 보면 모본왕은 재위 2년(49년) 2월, 군사를 보내 후한(後漢)의 북평ㆍ어양ㆍ상곡ㆍ태원을 기습 공격했다. 지금의 북경지역인 북평과 그 주변을 공격해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것은 그의 대담한 결정 때문이었다. 후한은 재물을 바쳐 고구려에 화친을 요구했고, 고구려는 이 기습작전의 효과로 막대한 재물을 얻는 성과를 올렸다. 게다가 흉년이 들자 사람을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한 임금이었다. 이런 모본왕이 무슨 영문인지 재위 4년부터 갑자기 포악한 임금으로 돌변해 2년 뒤에 두로에게 죽었다고 한 것이다.
첫 번째 의문은 모본왕을 암살한 두로라는 인물이 이 사건 이후로 완벽하게 기록상에서 사라져버렸다는 점이다. 그가 임금을 죽인 죄로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도 없고, 반대로 그 공로로 무슨 상을 받거나 높은 벼슬에 올랐다는 기록도 없다. 이것은 두로가 배후세력의 사주를 받아 모본왕을 살해하는 임무만 완수하고 역사 무대에서 사라져버린 셈이다. 그 배후세력은 태조대왕과 부여 태후 일파다. 
게다가 모본왕의 친모가 호동왕자를 질투해 자살하게 만든 악녀라는 사실이 그녀의 아들인 모본왕도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악독한 성격을 쏙 빼닮은 폭군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호동왕자의 죽음을 애통해한 당시 고구려 사람들은 두로의 모본왕 처단을 응당한 일로 인정했을 것이다. 정변 주도 세력은 모본왕의 아들, 태자 익을 제쳐두고 유리명왕의 손자인 7살배기 궁을 왕위에 추대했다. 이때 추대된 왕이 바로 제6대 태조대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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