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 … 행사는 연기
상태바
부처님오신날 … 행사는 연기
  • 김상진 기자
  • 승인 2020.04.28 17: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국 사찰서 ‘코로나19 극복과 치유’ 한 달 기도
법회 연기한 스님들 “긍정적 마음으로 사찰 정비”
“감내할 만한 고통 … 이기고 웃으며 볼 날 꼭 와”

“넓은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
음력 사월 초파일(4월 30일)은 부처님오신날이다. 불교 4대 기념일은 초파일과 석가출가일(2월 8일), 열반일(2월 15일), 성도일(12월 8일)이다. 이중 초파일이 가장 큰 기념일이다. 이날은 불자건 아니건 부처님오신날을 기념하며 법정공휴일이다. 이날 불교인들은 연등 행사와 관등놀이를 중심으로 다양한 행사를 벌인다.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19 여파로 대한불교 조계종과 태고종, 천태종, 진각종 등 30여개 불교 종단으로 구성된 한국불교종단협의회는 지난 18일 “4월 30일, 불기 2564년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요식을 5월 30일로, 4월 25일 예정했던 연등회를 5월 23일로 변경한다”고 알렸다. 불교계는 4월 30일부터 전국 사찰 1만5000여 곳에서 ‘코로나19 극복과 치유’를 위한 한달 기도를 시작한다.

구림 회문산 만일사 
만일사는 회문산 자락 안정리 337번지에 있는 조계종의 사찰이다. 
만일사는 384년(침류왕1년) 창건한 것으로 연구 발표되었다. 1760년(영조 36)에 간행된 《옥천지》에 “만일사는 백제 때 원찰이며 요사채가 두 채, 암자는 동암ㆍ칠성암ㆍ선적암 세 채가 있었으며 만일사가 있던 산꼭대기 천길 위에 돌샘이 있어서 가뭄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내렸다”고 기록돼 있다.
만일사는 고려말 조선초 무한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다. 만일사라는 이름도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하려고 만일 동안 이곳에서 기도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다시 중건했지만, 정유재란 때 침입한 왜구가 절에 불을 붙여 타버렸다. 이후 지홍과 원측 대사에 의해 다시 증축되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또 폐허가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이금당이 대웅전, 칠성각, 산신각 등을 짓고 불사를 추진했으나 6ㆍ25전쟁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1954년 현재 위치에 법당과 삼성각, 요사채 등을 새로 건립했다. 현 위치에서 산 위쪽으로 200미터 지점에 기와 등 옛 자취를 찾을 수 있다. 만일사는 많은 역사적 아픔을 겪었으나 빼어난 산세로 수많은 고승이 찾아왔고 배출되었다. 
만일사 현 주지 자영스님은 “코로나19 때문에 정말 어려운 상황이다. 이럴 때 일수록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사찰에 손봐야 할 곳이 많았다. 법회가 중단되어 이것들을 손볼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이 세계는 아무리 힘들어도 감내할 수 있는 만큼만 고통이 주어진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종교 생활도 열심히 하면 잘 이겨내고 웃으며 볼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라 믿는다”라고 위로 말을 전했다. 

▲만일사 대웅전.

팔덕 강천산 강천사 
강천사는 팔덕면 청계리에 있는 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의 말사이다. 
강천사는 용이 꼬리를 치며 승천할 형상이라 하여 용천사라고도 불렸다. 선조 때 학자 귀봉 송익필이 이곳에 유숙하며 <숙강천사>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었는데 이때부터 강천사라고 불렸다. 
강천사는 887년(신라 진성여왕)에 창건했다. 도선국사(신라 말 승려로 풍수설 대가)가 불교 전파를 위해 전국을 수행 다니던 중 천태만상 기암절벽과 굽이굽이 맑은 물이 사계절 흐르는 빼어난 절경에 강천사를 창건했다. 
강천사에 소속된 암자는 명적암ㆍ연대암ㆍ용대암ㆍ왕주암 등이 있었다. 왕주암은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 후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후방 요충지인 금성(나주)을 공격할 때 이 암자에 머물렀는데 이를 계기로 왕주사로 이름 짓게 되었다. 
이후 1482년(조선 성종13)에 작성된《강천사 모연문》기록을 통해 강천사가 신말주의 부인 설씨의 시주를 받아 중창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소실되었다. 1604년(선조 7)에 소요대사가 중창했다. 1760년(영조36) 경진판《옥천군지》기록에는 강천사는 불전이 3개소, 승방이 12개소이며 속한 암자가 12개, 수도승 500여명이 살던 대거찰이다. 
강천사는 6ㆍ25전쟁을 겪으며 보광전, 칠성각, 첨성각의 당우가 모두 불탔다. 당시 주로 비구니들이 머물렀는데, 도선국사가 “머리카락과 수염이 없는 사람이 있어야 빈찰이 부찰이 되고 도량이 정화된다”라고 예언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온다.
강천사 대웅전 앞마당에는 1316년(고려 충숙왕3)에 건립된 강천사 오층석탑(전라북도 기념물 제92호)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300여년) 모과나무(전라북도 기념물 제97호)는 지금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있다. 
작년 10월에 부임해 장화 신고 삽질하며 직접 강천사를 정비하고 있는 정오스님은 “코로나19 때문에 법회가 중단되는 동안 손 봐야 할 곳을 정비하고 있다. 매해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다 보니 많이 조심하고 있다. 정비하면서 느낀 것이 우리 법당이 참 비좁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오가며 법회를 보는 곳인데 법당이 좁아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참 곤란할 때가 많다. 군에서 조금 도움을 주면 좋겠다”면서 “세상이 어지럽고 힘든 상황이다. 이럴 때일수록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 항상 그래왔듯이 우리는 모두 잘 이겨낼 수 있을 거다”고 격려했다.  

▲강천사 주지 정오스님.

복흥 영구산 구암사
구암사는 영구산(도집산) 중턱에 있는 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의 말사이다. 
364년(백제 무왕35)에 승제법사가 창건했다. 1392년(조선 태조1)에 중창하고 이름을 구암사로 바꿨다. 사찰 동편 지점에 숫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었고 대웅전 밑에는 암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어 구암사(龜巖寺)라고 불렸다. 당시 절터는 현재 구암폭포가 있는 부근으로 전해온다. 
구암사 사세를 다시 크게 일으킨 것은 영조 때 화엄종주인 설파 상언(雪坡尙彦)이 머물면서이다. 설파는 구암사에서 선강법회를 열어 불교문화의 꽃을 피웠고 이로부터 100여 년 동안 화엄종맥의 법손이 계승되었다. 당시는 전국 굴지의 사찰로 각처에서 운집한 승려가 1000여명에 이르렀다. 1800년대초 백파 긍선(白坡亘璇)이 현 절터에 건물을 중창하고 선강법회를 열어 선풍을 크게 일으켜, 백파의 설법으로 각처에서 입산수도하려는 승려가 모여 선문 중흥조라 불렸다. 
구암사는 백파의 가르침을 받은 석전 박한영을 배출하기도 했다. 석전은 뛰어난 학승이었고 근세 한국불교 3대 강백이었다.  
구암사는 6ㆍ25전쟁으로 빨치산이 숨어들어 많은 유적이 소실되었다. 1957년 다시 복원했지만 2년 뒤 다시 불에 탔고 1973년 5월에 중창해 1997년 삼성각을 지어 오늘날 이르고 있다.  

▲구암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순창 농부]순창군창업유통연구회 변수기 회장, 임하수 총무
  • 최순삼 순창여중 교장 정년퇴임
  • 선거구 획정안 확정 남원·순창·임실·장수
  • 순창시니어클럽 이호 관장 “노인 일자리 발굴 적극 노력”
  • 군 전체 초·중·고 학생 2000명대 무너졌다
  • “조합장 해임 징계 의결” 촉구, 순정축협 대의원 성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