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33) 석전 박한영
상태바
순창인물(33) 석전 박한영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4.28 17: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 근현대 불교계 지도자

국권 피탈 전후 한국불교계, 해인사 주지 이회광 등은 아예 친일의 길로 나섰고 일부 스님들은 산중에서 참선 수행에만 정진하고 있었다. 이 어둠 속에서, 만해ㆍ용성 스님과 함께 횃불을 높이 들며 범부중생들을 이끌었던 이가 바로 석전 박한영(石顚 朴漢永) 정호(鼎鎬) 스님이다. 
석전은 뛰어난 학승(學僧)이었을 뿐만 아니라 근세 한국불교의 3대 강백(경론을 강의하는 승려)이었고, 불교계의 혁신을 주도한 큰 인물이었다. 그는 구암사(龜巖寺)에서 수학했고 1912년부터 수년간 구암사와 구암사 인근에 있는 만일사ㆍ연대암, 정읍 내장사 주지까지 겸무(兼務)했던, 순창과 인연이 깊은 큰스님이었다. 

▲석전 박한영.

가계와 출가

석전 박한영(1870~1948)은 고종 7년 9월 14일, 전북 완주군 초포면 조사리에서 부 성용(聖容)과 모 진양 강씨(晉陽 姜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불명(佛名)은 정호(鼎鎬), 호는 석전(石顚)이다. 한영(漢永)은 그의 자(字)이자 속명(俗名)이다. 
출가 이전에는 통사와 사서삼경을 수학하면서 한문과 학문적인 기초를 닦았고, 16세에 이미 서당의 학동들을 가르칠 만큼 배움이 깊었다. 17세 되던 해 어머니가 전주 위봉사 금산 스님에게 들은 삶과 죽음에 관한 생사법문을 전해주자 크게 발심해 출가를 결심했다고 한다. 19세 되던 해 금산 스님에게서 계를 받고 정호라는 법명을 받은 이후 장성 백양사 운문암에서 본격적인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구암사에서 설유 스님의 법을 잇다

석전은 21세 때 운문암에서 환응(幻應) 스님에게 사교(四敎)를, 23세 때 순천 선암사로 가서 경운(擎雲)스님에게 대교를 이수하고, 26세(1895년)에는 구암사 설유 스님 문하에서 수학했다. 
구암사는 순창군 복흥면 봉덕리 영구산에 있는 사찰로, 634년(백제 무왕 35)에 창건되었다. 추사 김정희가 한때 공부했던 곳이고, 조선 후기의 대강백 설파 스님과 백파 스님 이후 설유 처명으로 법이 이어져 불교 강학의 중심으로 자리 잡으며 많은 학승을 배출한 사찰이다. 설유는 “화엄십지이구지보살(華嚴十地離垢地菩薩)”이라 숭앙을 받는 설파의 9세 법손이며 백파의 6세 법손이었다.
석전은 설유 스님에게 법을 이어받고, 염송ㆍ율장ㆍ화엄을 수학하고, 법통을 이어받아 개강했다. 이때 당호를 영호(映湖)라 했고 석전(石顚)이라는 시호도 갖게 되었다. 이 법호는 일찍이 추사 김정희가 백파 스님에게 “훗날 법손 가운데 큰 도리를 깨쳐 나라의 기둥감이 될 재목이 나올 터이니 이 호를 전하라”며 전해 준 것이었는데 설유에게 전해져 석전에게 전수된 것이다. 석전은 설유의 법을 이어받은 뒤에 잠시 구암사에서 강사 생활을 했다. 
석전은 우리나라 불교의 주맥인 선학과 화엄을 통달하고 설유의 박식을 전수하며, 27세(1896년) 되던 해부터는 한국불교계의 사상적 지도자로서 대강백(大講伯)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어 산청 대원사ㆍ장성 백양사ㆍ해남 대흥사ㆍ합천 해인사ㆍ보은 법주사ㆍ구례 화엄사ㆍ안변 석왕사ㆍ동래 범어사 등에서 대법회를 열어 그때마다 청중들의 가슴속에 돈독한 불심을 심어서, 그의 강의를 듣고 학인들이 꼬리를 물었다. 

▲구암사 1930년대 모습.
▲구암사 1930년대 모습.

불교 유신과 항일 운동

석전은 39세 되던 해(1908년), 서울에 올라와 만해ㆍ금파 스님 등과 불교유신운동에 참여했다. 1910년 국권 피탈 이후에는 만해ㆍ성월ㆍ금봉 스님과 함께 임제종(臨濟宗)을 설립해 조선불교 정체성을 지키려 노력했다. 당시 총독부가 이회광(李晦光) 등을 앞세워 조선불교를 일본불교 조동종(曹洞宗)과 통합하는, ‘불교 한일합병’의 음모를 분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는 3ㆍ1운동 당시 민족대표로 합류하지는 못했으나 3ㆍ1운동 이후 한성 임시정부 국내 특파원과 전북 대표를 맡기도 했고, 조선민족대동단에 합류해 항일 운동에 참여했다. 
그가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1933년, 일본이 강요한 천장절 기념식 경축사에서의 일이다. 당시 일본이 가장 큰 명절로 여긴 행사에서 연단에 오른 석전은 “아아 그런디… 오늘이 바로 일본 천황 생일이래여. 그러니 잘들 쉬어”하면서 내려와 버렸다. 불과 10초가량 경축사에 어안이 벙벙해진 학생들은 한참 후 폭소를 터뜨렸다. 일본에 대한 반감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한국 근현대문학 산파역

석전은 단행본 형식의 역서와 저술 9권을 비롯해 100여 편이 넘는 논설과 수필을 남겼다. 석전은 평생 4만 권에 가까운 도서를 읽었다고 한다. 이런 방대한 글쓰기와 독서는 당대 한국불교와 겨레가 처한 현실을 헤치고 미래로 나가기 위한 열정과 염원의 기도이기도 했다. 
석전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학계와 문화계 전반에도 영향을 미친 지식인이었다. 만해를 비롯해 정인보ㆍ이능화 등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이 그를 정신적 스승으로 모셨다. 최남선ㆍ서정주ㆍ이병기ㆍ신석정ㆍ조지훈ㆍ김동리 등 내로라하는 문인들도 모두 석전의 제자이거나 학문적ㆍ인격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석학인데다 친일 행적이 없는 그의 곧은 지조와 인격에 수많은 당대 지성들이 감화되었던 것이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자타가 공인했던 육당 최남선은 석전이 유일하게 남긴 한시집인 《석전 시초》를 발간했다. 그는 발문에서 “석전 사(師)를 만나매, 내전이고 외전이고 도대체 모르는 것이 없을 만큼 박식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물어볼 것이 없는데, 석전 선생에게는 물어볼 것이 있다”고 탄복했다. 《심춘순례》는 최남선이 석전을 모시고 호남과 지리산 일대를 순례한 후에 1926년에 펴낸 견문록이다. 이 책의 속표지에는 “이 작은 글을 석전 노사에게 드리나이다”라고 쓰여 있다.
위당 정인보도 《석전 시초》에 실린 <석전상인 소전>(石顚山人 小傳)에서 “대관절 박한영과 함께 길을 갈라치면 한국 땅 어디에 가나 그는 모르는 게 없다. 산에 가면 산 이야기, 물에 가면 물 이야기… 이른바 사농공상(士農工商) 무엇에 관한 문제를 꺼내든 간에 화제가 고갈될 줄 모른다”고 석전을 평했다. 
미당 서정주와의 인연도 각별하다. 석전은 서울중앙고보와 고창고보에서 퇴학당하고 방황하던 서정주를 중앙불교전문학교 제자로 받아들였고, 서정주는 석전을 “나의 뼈와 살을 데워준 스승”이라고 부르며 평생 존경했다.

말년과 입적

석전은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과 조선불교 교정을 맡아 보며 불교계의 발전에 진력했고, 8·15 해방 후에는 조선불교 초대 교정(지금 조계종의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정읍 내장사에 내려와 수양하던 1948년 4월 8일 세속 나이 일흔아홉 살, 법랍 예순한 살에 내장사에서 신병 하나 없이 좌선 입정해 육신을 벗었다. 
육당 최남선은 노년에 이른 스승 석전으로부터 들었다며 석전의 생사관(生死觀)을 전했다. “늙음을 허무하다고 하는 말은 죽음과 삶을 깊게 모르는 입에서나 나오는 법, 한지에 먹물 번지듯 햇살이 창에 들듯 죽음은 삶에 스며드는 법, 밝고 따스하게 스미는 죽음의 이치를 알고 나면 늙음도 더이상 두려운 게 아니지, 죽음을 알고 나면 지혜로움만 남기에, 오히려 태평스러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순창 농부]순창군창업유통연구회 변수기 회장, 임하수 총무
  • 고창인 조합장 징역 2년 구형
  • 최순삼 순창여중 교장 정년퇴임
  • 순창읍 관북2마을 주민들 티비엔 '웰컴투 불로촌' 촬영
  • 선거구 획정안 확정 남원·순창·임실·장수
  • 순창시니어클럽 이호 관장 “노인 일자리 발굴 적극 노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