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34) 무외국사 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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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34) 무외국사 정오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5.14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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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렬ㆍ충선ㆍ충숙왕 때 ‘왕사’와 ‘국사’

순창군은 마한시대에는 오산(烏山)ㆍ옥천(玉川)으로 불렀고 백제 때는 도실(道實), 남북국시대(후기신라)에는 순화(淳化)라 했다. 고려 성종 14년(995) 순화군이 순주(淳州)로 개칭 승격되었지만, 현종 9년(1018)에는 순창현(淳昌縣)으로 격이 낮아졌다. 충숙왕 1년(1314) 순창현이 군(郡)으로 승격되고 그때까지 남원부 임내(경내)였던 적성현이 몇 개의 소와 함께 순창군에 소속되었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이때 순창현이 군으로 승격된 것은 무외국사(無畏國師) 정오(丁午)의 고향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오 국사 생가터 전경.
▲정오 국사 생가터 전경.

출생 설화
일명 무외(無畏)라고도 불린 정오(丁午)는 고려 후기 충렬ㆍ충선ㆍ충숙 3대 국왕에게 왕사와 국사(국통)로 추앙되면서 불교계를 이끌던 천태종 고승이다. 
정오는 순창군 풍산면 용내리 가는골(현재 순창읍 신남리)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해와 입적한 해는 분명하지 않으며, 정오가 법명(法名)인지 법호(法號)인지도 불분명하다. 토착 유력 집안의 자제였다는 설이 있는데, 출생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대승(大僧)의 출생이 범상치 않았음을 보여 주는 출생 설화가 전한다. 
용내리 마을 앞을 흐르는 월천은 가남리 앞을 지나 섬진강으로 흐른다. 당시 섬진강에는 용이 살고 있는 용소(龍沼)가 있었고, 그 근처에 용혈이라는 동굴이 있어 그 굴이 용내리 부근까지 뚫려 있었다고 한다. 동굴 부근에 용혈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고려 후기 순창현 용내리에 천녀라는 처녀가 살고 있었다. 천녀는 어느 봄날 나물을 캐기 위해 바구니를 들고 들판을 다니다가 동굴 근처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때 섬진강에 살던 용이 승천하는 기운을 기르기 위해 매일 정오가 되면 용소에서 이곳 동굴 끝까지 왔다 갔다 했다. 용이 동굴 끝에서 용소로 돌아가기 위해 꼬리를 휘어 치자, 가려졌던 동굴문이 열리게 되었다. 마침 그곳에서 나물을 캐던 천녀는 그만 동굴로 빠져 버렸다. 정신을 잃은 채 용의 등에 업혀 용소까지 딸려 가게 되었다.
한참 후 그녀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동굴 앞 풀밭이었다. 놀라 일어나서 생각해 보니 용의 등에 업혔던 기억만 떠오를 뿐이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고, 열 달이 되어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가 바로 훗날 국통이 된 정오 선사였다.
동네 사람들은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히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천녀는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를 업고 동굴 앞에 가서 눈물을 흘리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다가 그만 기진맥진해 쓰러져 버렸다. 어두운 밤이 될 때까지 천녀는 실신해 있었고, 배가 고픈 아이는 엄마 등에 업혀 울어댔다. 
자정쯤 용혈암 주지승이 좌선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한밤중에 무슨 아이 울음소리인가 싶어 주지승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 보았다. 주지승은 모자를 암자로 옮겨 보살폈고, 암자에 기거할 수 있도록 했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아이 엄마는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정오 국사 영정. 금강신문 사진.
▲정오 국사 영정. 금강신문 사진.

승과 장원급제 후 수행
정오는 젊은 시절에 승과(僧科)에 응시, 상상과(上上科)로 합격(장원급제에 해당)했으나 명리(名利)를 버리고 지방의 여러 암자에서 수도에 정진했다. 
충렬왕 4년(1278)부터 용혈암(龍穴庵)에 머물렀다. 용혈암은 전남 강진군 만덕산 백련사(白蓮寺) 남쪽 십 리쯤에 있던 부속 암자다. 백련결사의 제2세 사주였던 천인(天因)이 이곳에서 입적했고, 4세 사주인 천책(天頙)도 오래 주석(승려가 포교하기 위해 한동안 머무름)하면서 고려 후기 종교 민중운동인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주도했던 곳이다.
1290년 봄에 괘탑암(掛塔庵)으로 옮겨 암자 남쪽 봉우리에 능허대와 초은정을 세우며 13년간 머물다가 보월산(영암 월출산의 옛 이름) 백운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충렬왕 28년(1302)에 정오는 왕의 청에 따라 묘련사(妙蓮社)의 제3세 법주(法主)가 되었다. 개경 송악산 기슭에 있는 묘련사는 충렬왕이 종묘사직의 복을 위해 1283년에 창건한 원찰(願刹)이다. 이곳에서는 정오의 법형(法兄)으로서 백련사 사주였다가 상경한 원혜국통 경의(景宜)가 주맹이 되어 묘련결사(妙蓮結社)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묘련결사는 <법화경>과 이에 대한 천태대사의 주석서를 연구하고 강의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충렬왕 때 왕사로 책봉
고려시대 임금들은 고승(高僧)들을 스승으로 삼아 정치ㆍ사회ㆍ문화 등 각 분야에 대한 조언을 받으며 백성의 신뢰를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고려시대에는 교종선과 선종선의 최고 법계인 승통과 대선사 위에 왕사와 국사가 있었다. 왕사(王師)가 왕실의 고문이자 스승이라면 국사(國師)는 국가의 사표(師表ㆍ학식과 덕행이 높아 남의 모범이 될 만한 인물)로서 존경을 받는 존재였다. 국사는 생전에 책봉하는 경우와 사후에 추봉하는 경우로 나뉘는데, 후자는 대체로 왕사가 죽은 후 국사로 추봉되었다.
충렬왕 33년(1307) 여름에 국왕은 정오에게 제자의 예를 행하며 왕사로 봉하고 불보조정혜묘원진감대선사(佛普照靜慧妙圓眞鑑大禪師)라는 법호를 올렸다. 왕사로 책봉되면 오래 지나지 않아 중앙에서 은퇴해 하산소(下山所ㆍ왕사로 책정되어 산에서 내려올 때 주석한 곳)에 머물게 하는 것이 고려의 상례였다. 정오는 용두산 금장사(金藏寺)를 하산소로 했다. 백은(白銀) 16근을 희사해 금장사의 금당(金堂)을 수리하고, 주불인 미륵삼존상을 개금했다.
서기 1308년 충선왕이 즉위했다. 예전부터 정오를 지극히 존경했던 충선왕은 즉위식이 있던 날 금장사에 머물던 정오를 궁으로 청해 용상(龍床)에 나란히 앉도록 했다. 그리고 정오에게 선교각종산문도반총섭조제(禪敎各宗山門道伴摠攝調提)라는 호를 올려 공의사(共議事)의 일을 맡도록 했다. 즉 선종과 교종의 각 종파를 모두 감독하고 조정하는 최고의 임무를 맡긴 것이다.

충숙왕 때 국통에 책봉, 순창군 승격
1313년 11월에 충숙왕이 즉위하면서 종무를 관장하는 불교계 최고 원로인 국통에 책봉되고, 대천태종사쌍홍정혜광현원종무애국통(大天台宗師雙弘定慧光顯圓宗無㝵國統)의 법호를 제수받았다. 이때 순창현이 정오 국통의 출신지이므로 순창군으로 승격시켰다. 
1314년(충숙왕 1)에는 반성(현재 경남 진주)의 용암사(龍巖寺)를 하산소로 해 옮겼다. 왕명에 의해 1315년부터 1318년 11월까지 4년 동안 용암사를 중창해 80여 칸을 새로 짓고, 20여 칸은 중수했다. 용암사를 중수한 뒤 정오의 말년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으나 아마 오래지 않아 이곳에서 입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법형(法兄ㆍ한 스승에게서 법을 같이 받은 사람)으로 원혜국통(圓慧國統)이 있고, 제자로는 굉지(宏之)ㆍ승숙(承淑)ㆍ중덕(中德)ㆍ일생(日生) 등이 있었다. 문장에도 능해 조선시대 서거정 등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에 글 20여 편이 전한다.
정오의 불교관은 근본적으로 법화사상(法華思想)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예참법(禮懺法)에 따른 참회와 미타ㆍ관음ㆍ미륵신앙과 같은 정토신앙(淨土信仰)도 수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그의 사상 경향은 서민불교적인 순수성을 잃은 채 보수적인 귀족불교로 변질해 갔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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