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 ‘객지에 나가서도 생각 나, 손맛이 그대로니께!’
순창읍내 터미널 사거리, 번듯한 건물들 사이에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새겨진 가게, 40년을 부대껴온 순창식당이 있다. 바쁜 낮 장사를 마치고 숨을 고르던 최옥자(75) 사장님 대신 40년 단골손님들이 가게 자랑을 한다.
“여기는 짜장 소스가 달라. 맛이 깊어.”
“40년 전에 먹고, 그 맛을 잊지를 못해 자꾸 오죠. 요새는 사장님 정 때문에 계속 오고.”
택시를 운전하는 윤병하(순창읍) 씨는 “객지 나가 있을 때도 일부러 와서 먹었어요. 택시 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버스 기사들도 많이 와요. 맛이 변하질 않아. 주방장님이 계속하시는 거야. 그러니 음식 맛이 그대로지.”
손님들이 추켜세우는데 최옥자 사장님은 덤덤하게 말한다. “입맛이 맞는 사람들이 오지. 우리는 설탕이 안 들어가. 기름도 따로 안 넣어. 지금 사람은 설탕 좋아하지. 단 거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입맛이 다 다르니까. 돼지기름으로 야채를 볶아. 짬뽕 한 그릇이면 한 그릇, 두 그릇이면 두 그릇, 주문에 들어오면 볶아. 바로 볶아서 내. 힘들어도 그렇게 해야 해. 안 그러면 야채가 퍼져불잖아. 재료야 똑같지.”
외출했던 주방장 사장님이 오셨다. 하종옥(79) 주방장 사장님 손에는 약봉지가 들려있었다.
“어지러워요. 잠도 잘 안 오고.” 부인인 최옥자 사장님이 걱정스레 거든다. “아무래도 주방에서 가스 마시고 하니까. 연세도 많이 잡수셨고. 그래도 일하는 게 나아. 집에 있는 거보다 담배값도 벌고, 손님들하고 이야기도 하고.”
하종옥 주방장 사장님은 광주 태생. 17세부터 식당 일을 했다. 맞으면서 배웠다. 재주가 좋았던지, 19세 때 가르치던 주방장이 ‘더 가르칠 게 없다’며 손을 뗐다. 주방장이 돼 순창에 처음 가게를 냈다. 요즘은 배달은 아들이 맡고, 딸은 점심 장사와 바쁠 때 도와준다. 가족들이 함께 큰 욕심 없이 일한다.
“술을 안 드시니 건강하게 이렇게 하지요.” 남편 하 씨는 십여 년 전, 좋아하던 술을 딱 끊었다. 딸이 백혈병 선고를 받았을 때다. 딸을 살리는 것밖에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돈이 있어야 딸을 살린다 싶어 술을 끊어버렸어. 우리는 돈을 벌고, 아들은 피가 부족하다 하면 누나를 싣고 병원에 다녔어. 수혈하느라고 군청에서 버스 내줘, 순고 학생들 싣고 병원에 갔어. 동생도 수혈하고, 학생들도 해주고. 그렇게 나았어. 나라에서도 지역에서도 수술비를 보태줬어. 고맙지.”
십여 년 전의 일인데도 어제 일인 듯, 이야기하는 아버지 하 씨의 눈가가 붉다. 이제 노부부는 더 바라는 게 없다.
“한 데까지 하고 그만둬야지. 손님들이, 주방장님이 건강하셔야, 우리가 먹으러 온다니까, 아직도 하고 있지.”
손주들이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잘한다. 손주들 이야기할 때, 할아버지 입이 절로 벌어진다. 손주들 오면 좋아하는 짜장면을 해준다. 손주 입에 들어가는 짜장은 뭐가 다를까?
“똑같지요. 손님한테 나가는 거나. 손주한테 나가는 거나.”
문득 하 씨 손을 보았다. 60년 동안 면을 뽑고, 고기와 야채를 볶아 짜장을 만든 손. 노인 손처럼 보이지 않고 단단하다. 뼈마디가 불거져 있다. 이 손이 두 남매를 키우고 가게를 지켜온 손이다. 순창식당 짜장면은 아직 한 그릇에 오천 원이다. 짜장면 한 그릇이 참 귀하다.
힘내라, 우리 동네 작은 가게 (1)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최대의 위기, 코로나19로 가게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위기일수록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선명해진다. 우리 동네 가게들이다. 오랫동안 순창에서, 순창사람들과 삶을 일구며 순창을 지켜온 가게들이다. 갖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숨 쉬어온 우리 동네 작은 가게들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