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35) 적성 용수막 ‘최영’, 가잠마을 ‘권일송’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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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35) 적성 용수막 ‘최영’, 가잠마을 ‘권일송’ 시인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5.20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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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군산지역 문학 발전에 공헌 

최영(崔瑛ㆍ1945~2011) 시인은 1945년 적성면 용수막에서 태어났다. 적성초등학교와 순창중학교를 거쳐, 1964년 순창농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재학 때 시인 권진희의 영향으로 문학을 하게 되었다. 권진희 시인을 지도교사로 김형오, 양병두 등과 ‘옥천’이라는 문예부를 만들어 회장을 역임하면서 각종 백일장 대회에서 수상하며 언어 구사와 표현력에 남다른 실력을 보였다. 
군 제대 후 대림산업(주)에 입사해 브루나이 현장에서 일하던 중 추락, 장애 몸으로 귀국했다. 이때 입은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1971년 군산시청에 공채로 합격한 후 군산에 터를 잡는다. 40여년간 공직에 있다가 2004년에 군산시 월명동장으로 정년 퇴임했다. 
군산시청에 근무하던 1984년, 월간 《시문학》에 <개구리>ㆍ<희화>ㆍ<참새> 등의 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개구리》ㆍ《미룡동의 참새》ㆍ《내항》을 발간했다. 
1997년부터 한국문인협회 제11대 군산지부장을 2년 동안 역임하며 군산문인협회 정관을 재정비해 행정적 기초를 닦았고, 군산지역 문화 발전에 이바지했다. 한국문인협회 군산지부장, 전북문인협회 부회장, 채만식문학상 운영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군산지역 문학 발전과 문인협회 위상 제고에 크게 기여했다.
최영은 군산의 내력을 인물ㆍ지역ㆍ다양한 사물 등의 역사를 사초(史草)하는 마음으로 많은 기록을 남겼다. 연작 수상록 《은파에서 째보 선창 까지》, 산문집 《군산풍물기》등을 출간했다. 
수상록 《은파에서 째보 선창까지》는 장장 13년 4개월 동안 총 414회에 걸쳐 군산의 여러 신문에 연재한 이야기를 책 6권으로 묶은 역사기록물로서 군산의 생생한 근현대사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습관적으로 국ㆍ내외 주요 사건 사고나 군산에서 빚어지는 웬만한 일이면 일기 쓰듯 기록을 해놓았다. 메모가 적힌 보따리를 풀어놓고 지역신문에 장기 시리즈로 연재하기 시작했다. 총 6권으로 펴낸 이 책은 하나의 사록(史錄)이다. 어느 하루도 빼놓지 않고 조금만 특이하다 싶으면 사초를 쓰는 마음으로 기록해둔 역사를 모두 이 책 속에 담았다. 
산문집 《군산풍물기》는 2008년부터 군산의 한 주간지에 연재한 군산의 정치ㆍ경제ㆍ문화ㆍ사회의 수많은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기록한 책으로, 작가가 직접 체험한 것과 지인들의 체험을 그대로 정리했다. 2005년 정년퇴임을 한 뒤로는 더욱 문인으로서의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군산뉴스에 크고 작은 군산 역사와 문학사를 동시에 《군산풍물기》로 재구성해 1회부터 126회까지 매주 1회씩 연재하던 도중 갑작스레 영원히 먼 나라로 갔다. 
제5회 한국 시학 신인 문학상, 제3회 전북 시인상, 제17회 표현 문학상, 제47회 군산 시민의 장 문화장 등을 수상했다. 2011년 6월 29일 사망했다. 묘는 국립임실호국원에 있다.
2011년 7월 한국문인협회 군산지부는 최영 시인을 추모하는 《군산문학》제27호를 펴냈으며, 2012년 1월 28일 한국문인협회 순창지부는 ‘최영 시인 추모 특집’으로 꾸며진 《순창문학》제16호 출판기념행사를 열었다.
권일송-목포 문단의 출발을 알린 선두주자

권일송(權逸松ㆍ1933~1995) 시인은 1933년 순창읍 가남리 가잠 마을에서 태어났다. 광주고등학교와 전남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순창 태생이지만 방황과 좌절 그리고 열정과 고뇌의 젊은 날을 목포 땅에서 뒹굴었다. 1956년부터 1970년까지 목포 영흥고등학교와 문태고등학교 등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목포지역 고등학생 문예반을 결성해 목포문학 활성화에 기여했다. 
그는 목포문단의 실제적인 출발을 알리는 선두주자이기도 하다. 영흥고등학교에 재직 중이던 1957년 1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불면의 흉장>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강변 이야기>가 동시에 당선되어 화려하게 등단했다. 그는 당시 목포에 이른바 ‘신춘문예 바람’을 몰고 온 장본인이었다. 1965년에는 《주간한국》에 장편 서사시 <미처 못다 부른 노래>를 25회 연재했다. 
권일송은 1970년 10월부터 서울로 올라가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73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와 한국시인협회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1975년 한국문인협회 시분과위원장과 1976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와 한국현대시인협회 부회장을 맡았다. 1982년《한국경제신문》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987년 재경 전북향우회 고문과 제52차 서울국제펜대회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1991년에는 옥천향토문화사회연구소 고문을 맡고 고향 순창의 향토문화 발굴과 진작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다가 1995년 지병인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상경해서 적극적인 시작 활동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는 데 성공했지만, 아쉽게도 초창기의 시적 열정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데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의 초기 시가 아무래도 눈길을 끈다. 1966년에 첫 시집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한빛사)를 발간한 후, 《도시의 화전민》(1969), 《바람과 눈물 사이》(1987), 《바다위의 탱고》(1991) 등을 펴냈다. 
그밖에 평론으로 《우리 시와 시대상황》(1986) 등을 발표했으며, 저서로 《한국 현대시의 이해》(국제출판사, 1981), 《윤동주 평전》(민예사. 1984) 등을 발간했다. 수필집으로 《한해지(旱害地)에서 온 편지》, 《우리들의 시대를 위하여》 등을 간행했다.
그는 4ㆍ19 학생 시위가 있던 날, 신문사로부터 원고청탁을 받게 된다. 으슥한 밤이 다하도록 책상 앞에서 한 줄의 시도 생산하지 못했다. 마감시간이 다가오자 <무언의 항변>이라는 제목만의 빈 원고를 신문사에 송고했다. 신문사는 다소 당황했으나 시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제목만 있는 빈 여백의 편집을 감행했다. 신문이 나오자 시인은 공안 담당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는 그의 첫 시집(1966) 제목이자 대표작이기도 하다. 원래 이 시는 총 69행의 장시이다. 제목만 보면 다소 낭만적인 색채가 묻어나는 이 시는 그러나 저 4ㆍ19 혁명으로 대표되는 1960년대 이 땅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암울한 상황 속 “짓밟힌 청춘”의 방황과 좌절과 절규가 있다. 시인은 시집 후기에서 “이 땅의 학대받은 지성과 진실 앞에, 그리고 오늘의 몰락한 불구의 노래를 부른다”는 말을 남기고 있다. 
권일송 시인은 그와 함께 활동한 동시대의 시인들이 대부분 전통적이거나 자연 친화적인 경향으로 기울었음에 비해, 현실적이고 시사적인 사건들에서 소재를 취해 그것을 풍자ㆍ비판하는 주지적 시풍을 견지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60년 제6회 전남문학상, 1983년 제1회 소청문학상, 1985년 제8회 현대시인상 등을 수상했다. 2003년 11월 15일 순창읍 남산대 귀래정체육공원에 권일송 시비가 세워졌다. 시비에는 그의 대표작 <반딧불>의 일부가 새겨져 있다. 묘는 풍산면 설산 인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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