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재(248) 양심이 참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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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재(248) 양심이 참 나이다
  • 박재근 고문
  • 승인 2020.05.27 14: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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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작동하게 하는 것이 마음이며 마음 중에 최선의 마음을 양심이라 한다. 양심은 내 안에 있는 한울의 마음, 신의 마음으로 나에게 진정한 삶의 의미와 존귀함을 부여한다. 양심을 속이는 것은 몸을 위해 내 안의 신인 영혼을 속이는 것이며 진실과 진리를 외면하는 것은 신의 지혜를 거부하고 거짓 지혜를 따르는 것이다. 이성이란 영혼의 눈이다. 이성이 아닌 감정으로 세상을 산다는 것은 눈이 없이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사람들이 재앙을 만드는 것은 사물을 이성의 눈으로 보지 않고 욕정으로 보기 때문이며 이성을 길눈으로 하지 않고 욕정을 길눈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성의 안내가 없는 욕정의 길은 대립과 갈등, 반목으로 가는 길이며 불안과 불행으로 가는 길이다.
인생을 의미 있게 살려면 참 지혜를 가져야 하고 참 지혜를 가지려면 마음눈이 밝아야 한다. 마음눈을 밝게 하기 위해선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하고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위해선 양심을 탁하게 하는 욕심을 제거해야한다. 청정한 마음이란 이해득실과 욕망과 희로애락에 물들지 않는 양심이다. 몸 눈은 시야가 좁고 마음눈은 시야가 무궁하다. 몸 눈으로 세상을 보면 마음이 욕망이라는 틀 안에 갇히게 된다. 마음이 욕망의 틀에 갇히게 되면 욕망 밖의 세계에 대한 무지로 인해 어리석음에 묶이게 된다. 경계 안에 갇힌 마음눈은 지혜를 보지 못한다. 마음눈이 갇히게 되면 지혜가 갇히게 된다. 지혜는 경계가 없는 자유로운 마음속에서 살아난다.  
몸이 정신을 따라야 하는 것은 정신의 눈으로 사물을 보아야 불행으로부터 자기를 보존할 수 있고 자신의 삶을 신성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안에만 의존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감각적 감성적 가치만을 중시하게 되면 삶의 목적과 목표를 물질에 종속시켜 참 나인 보이지 않는 자아를 상실하게 된다. 마음이 보이는 사물에 종속되면 탐욕이 삶의 주가 되어 나의 핵심인 양심을 잃게 되고 양심을 잃으면 자신의 삶은 고결함을 잃고 천박하게 된다. 마음이 양심을 따르면 영혼이 살고 영혼이 살면 삶이 존귀하고 풍성해진다. 양심은 진실과 진리, 정의와 도덕으로 인간과 인간의 마음을 통하게 하는 상생의 길이다. 양심은 개인과 집단의 이해득실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의 삶을 의미 있게 한다.  
양심은 진리의 마음이므로 마음의 진수다. 양심은 가장 정직한 지혜이며 안전하고 확실하게 의미 있게 사는 길이다. 양심은 가장 참한 자기 사랑이다. 양심을 잃으면 나를 잃고 나를 잃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 의해 악의 도구로 이용된다. 소악은 쉽게 드러나지만 대악은 잘 드러나지 않아 사람들이 잘 속는다. 양심이 나의 삶을 우아하게 한다. 양심을 살리며 살기 위해서는 검소하게 살아야한다. 사치는 욕망을 조장하고 욕망은 모든 악의 씨앗이다. 부귀와 사치가 있는 곳에는 양심이 없고 양심이 있는 곳에는 청빈과 검소가 있다. 쉬운 이득이 있는 곳에는 악이 득실거린다. 노동이 없는 곳, 땀을 기피하는 곳, 개으름이 있는 곳, 욕망과 경쟁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악이 함께한다. 
욕망은 양심의 통제 하에서만 건강성을 유지한다. 검소를 몸으로 삼아 필요를 최소화 하고 나의 밖으로부터 최소한의 것만을 욕구하며 사는 것이 양심을 살리는 길이다. 진리의 마음은 비움으로써 쓰인다. 그러므로 마음이 꽉 찬 사람은 세속욕망을 비운다. 참으로 삶을 사랑하며 참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선한 본성인 양심을 소중하게 여겨 잘 가꿈으로써 악을 작아지게 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아에게 삶의 의미를 주는 가장 귀중한 양심을 소중하게 가꾸지 않고 욕심을 양심보다 우선시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훼손하면서 재앙을 만들고 마음을 괴롭히며 살아간다. 양심은 진리로서 사물의 가치와 의미를 심판하는 자기 안의 신이다. 양심은 남에 의해 심판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의해 심판 받는 것이며 드러나지 않는 잘못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진실을 속이고 부끄럽지 않다면 그것은 비양심이다. 양심이란 차별 없이 함께 사는 마음인데 사람들은 사람을 비교하고 차별하는 삶을 욕구하면서 아름다운 본성을 죄악으로 더럽힌다. 욕구를 절제하고 남이 나와 다름을 수용하는 것이 양심이다. 인생이 불협화의 파열음으로 불행한 것은 우리가 욕구를 절제하지 않고 다름을 수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름을 수용하려면 나를 비워야 한다. 나를 비운다는 것은 소신, 신념, 확신이란 편협한 틀에 나를 가두지 말고 나와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 융합하는 것이다. 

글 : 박재근 전북흑염소협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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