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36) 임진왜란 때 순창 출신 의병장 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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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36) 임진왜란 때 순창 출신 의병장 5분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5.27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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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응성(韓應聖)ㆍ조여관(趙汝寬)ㆍ김치세(金致世)ㆍ홍함(洪涵)ㆍ양사형(楊士衡)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전라도 지역은 피해를 보지 않았다. 그러나 정유재란이 발생하면서 일본군은 전라도 지역을 우선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1597년 8월 16일 남원성을 무너뜨린 일본군은 그 여세를 몰아 순창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때 순창군수 배경남(裵慶男)은 왜적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도주했고, 500여 명의 왜적들은 순창 읍민들을 잔악하게 도륙했다.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재산을 약탈했으며, 구림면 치천과 단풍정, 순창읍 아미산 밑에서 피난민들을 몰살시켰다. 풍산면 옥출산성(玉出山城)을 지키던 병사들도 적들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다. 임진왜란 때 활동한 순창 출신 의병장으로는 한응성(韓應聖)ㆍ조여관(趙汝寬)ㆍ김치세(金致世)ㆍ홍함(洪涵)ㆍ양사형(楊士衡) 등이 있다.

▲한응성 의병장 충의비.
▲임진왜란 때 전투가 치러졌던 옥출산성 남서쪽 성벽의 흔적.

 

한응성 … 금산전투에서 순국

한응성(韓應聖ㆍ1557~1592)은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경기(景期), 호는 구와(龜窩)다. 아버지는 대호군 한축(韓軸)이다. 임실군 삼계면에서 태어나 순창으로 옮겨 살았다. 동계면 구미리 남원양씨 16세(世) 생원공 양순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처가의 제사를 이어가며 처가봉사했다. 
조헌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헌이 의병을 일으키자 가산을 정리해 하인 수십 명을 데리고 합세했다. 금산전투에서 선봉이 되어 싸우다가 칠백 의사(七百義士)와 함께 전사했다. 위패는 금산 칠백의총(七百義塚)에 제향되었다. 
금산전투에 같이 참가했던 노비 부협(夫脅)도 싸움에서 큰 상처를 입고 쌓인 시체 가운데 은신했다. 부협은 적이 물러간 뒤에 한응성의 시체를 거두어 동계면 구미리에 장사를 치른 뒤 자신이 주인을 잘 모시지 못해 죽게 했다며 자결했다. 그 후 타고 갔던 말도 피로에 지쳐 죽었다고 한다. 
묘소는 동계면 구미리에 있다. 한응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892년(고종 29) 5월에 정려를 명하고, 이조 참의에 추증했다. 인계면 노동리에 한응성 충의비가 있다. 비석 앞에는 부협의 의로움을 기려 ‘충노 부협지비’도 세워져 있다. 2019년 1월 30일 순창군 향토문화유산 유형문화제 제1호로 지정되었다.

조여관 … 옥천부원군 조원길 후손

조여관(趙汝寬ㆍ1557~1592)은 본관은 옥천(玉川). 자는 사홍(士弘), 호는 모충재(慕忠齋)다. 7대조 할아버지가 옥천부원군 조원길(趙元吉)이며, 아버지는 참봉(參奉) 조응견(曺應堅)이다.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웠으며, 1577년(선조 10) 20세 때에 조헌(趙憲)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조헌을 따라 금산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웠지만 순절했다. 조여관이 순절하자 선조는 복호(復戶ㆍ조선시대에 충신, 효자 등 특정한 대상자에게 부역이나 조세를 면세해 주던 일) 완문(完文ㆍ해당 관아에서 발급하던 증명 또는 허가 문서)을 내렸다.

김치세 … 임진ㆍ정유 때 활약

김치세(金致世ㆍ1563~1597)는 1563년(명종 18) 풍산면에서 태어났다. 본관 김해(金海), 자는 준영(俊永), 호는 지지당(知止堂)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문민공(文愍公) 김일손(金馹孫), 아버지는 김장(金將)이다. 
조헌(趙憲)의 문인으로 1590년(선조 23)에 음직으로 선무랑 주부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변사정(邊士貞)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무주(茂朱)ㆍ한천(漢川) 등지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아들과 노복 수십 명을 거느리고, 모집한 수백 명의 의병과 함께 출전했다. 곡성에 주둔했다가 석곡(石谷)에서 적을 대파하고, 동으로 도주한 왜병을 뒤쫓아 구례 압록진(鴨綠津)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조정에서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를 추증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이등(二等)으로 녹훈(錄勳)했다. 1957년에 김치세가 살던 옛터인 풍산면 대가리에 사당을 창건해 옥산사(玉山祠)라고 하였다. 

홍함 … 금과 삼외당 주인공

홍함(洪涵ㆍ1539~1593)은 금과면 매우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양원(養源), 호는 삼외당(三畏堂)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문정공(文正公) 홍언박(洪彦博)의 후예다. 아버지 홍윤희가 16세기 초 전남 강진에서 처가인 순창설씨(淳昌薛氏)를 따라 금과면 매우리로 들어왔다. 
그는 남달리 총명해 5세 때 벌써 글자를 익혔다 하며, 천성이 착하고 효성이 지극하기로 이름이 났다. 유학자이자 청백리의 한 사람이던 우참찬(右參贊) 백인걸(白仁傑)이 보자마자 인물 됨됨이와 효성에 감복해 효행(孝行)으로 천거했다. 이후 사헌부 감찰, 문경현감 등을 지낼 때 치적을 남겼다. 
관직에서 물러나 임진왜란에 출전하기 전에 누정(정자)을 지어 자신의 호를 붙여 삼외당이라 했다. 지금도 정자에는 호방했던 백호(白湖) 임제(林悌), 전라도도사(都事)를 지낸 뒤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킨 충강공 오봉(鰲峰)  김제민(金齊閔), 담양에서 의병에 참가해 공을 세운 충장공 양대복(梁大福) 세 사람의 시 3수가 현판에 걸려 있다. 현 건물은 철종 7년(1856년) 남양홍씨 후손들이 다시 지은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동 수백 명을 거느리고 김천일 휘하 막료로 나아가 운량관(運糧官)의 중책을 맡아 군량미의 보급에 원활을 기하는 등 혁혁한 공헌을 했으나 전사했다.

양사형 … 원종공신 책봉

양사형(楊士衡ㆍ1547~1599)은 1547년(명종 17) 동계면 구미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계평(季平), 호는 영하정(暎霞亭)ㆍ어은(漁隱)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양배(楊培), 아버지는 사복시 부정(司僕寺副正)을 지낸 양홍(楊洪)이다. 
옥계(玉溪) 노진(盧禛)과 미암(尾巖) 유희춘(柳希春)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79년(선조 12) 33세에 생원시에 합격했고, 1588년 식년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군자감(軍資監)의 봉사(奉事)ㆍ직장(直長) 등을 역임했다. 1592년(선조 25) 벼슬을 사임하고 남원으로 낙향했는데, 여름에 왜적이 침범하자 도보로 선조가 피난해 있는 의주 행재소(임금이 궁을 떠나 멀리 나들이할 때 머무르던 곳)까지 갔다. 또한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이대윤ㆍ최상중 등과 함께 군량을 모아 금산의 전쟁터로 보냈다.
1594년(선조 27) 윤두수(尹斗壽)가 체찰사로 삼남 지방을 순시할 때 그를 보좌했다. 후에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변사정(邊士貞)ㆍ정염(丁焰) 등과 의병으로 활동하며 남은 왜적을 물리쳤다. 이러한 공로로 병조 정랑에 오르고, 이어 춘추관 기사관, 경기도사, 남평현감, 예조 정랑을 역임했다. 1599년(선조 32) 영광군수가 되었다가 임지에서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에 《어은유집》(漁隱遺集)이 있다. 승정원 도승지의 증직이 내려졌고, 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다. 후에 화산서원에 봉안되었다.

※이번 호를 끝으로 <순창인물열전>을 마칩니다. 다음 호부터 군내 11개 읍ㆍ면별 <우리 마을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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