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3) 동계 구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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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3) 동계 구미리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6.24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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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이야기 (3)
고려시대 택지법으로 조성된 600여년 전통마을

구미리(龜尾里)는 동계면에 속하는 법정리다. 현재 귀주(龜住)마을과 용동(龍洞)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2020년 5월말 기준으로 101가구, 인구수 183명(남자 95명, 여자 88명)으로 큰 마을이다. 한때 300여 호가 넘기도 했다. 구미리는 600년을 넘게 이어지는 남원양씨 집성촌으로, 고려시대 전통 마을이 어떠한 모습으로 조성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모범적인 씨족 마을이다. 전통 마을은 대체로 임진왜란 이후에 조성된 곳이 많지만, 구미리는 가문과 후손의 번창과 복록을 위해 땅을 택지한, 고려시대 택지법으로 조성된 곳이다. 구미리 사람들은 거북바위와 함께 마을 입구에 수구막이 선돌 2기를 세우고 숲을 조성했다. 

 

▲구미리 마을 전경.

이씨부인, 자손의 복록 위해 구미리를 택하다 

구미리에 있는 ‘고려 직제학 양수생 처 열부 이씨려’(高麗直提學楊首生妻烈婦李氏閭)는 고려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양수생(楊首生)의 처 이씨의 지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씨부인은 고려 말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개가하라는 부모의 청을 거절하고 동계면 구미리로 내려와 살았다. 정려에는 그에 대한 내력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377년 양수생의 부인 이씨가 임신 중에 남편과 사별하자 친정 부모는 당시 풍습대로 수년에 걸쳐 개가를 권유했다. 이씨부인은 개가를 거절하고 유복자 양사보(楊思輔)를 등에 업고, 남편과 시아버지의 과거합격증인 홍패(시아버지 양이시는 공민왕 4년, 남편 양수생은 우왕 2년에 문과시에 합격)를 가슴에 품고, 파주에서 시댁이 있는 남원까지 천 리 먼길을 내려왔다. 
남원에 내려온 얼마 후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의 침입이 있자, 이씨부인은 순창 쪽으로 길을 떠나기로 했다. 그녀는 남원부 대산면에 위치한 비홍치 고갯마루에 올랐다. 사방 산의 정기를 살피는데 서북쪽 순창 구악산(무량산)이 매우 수려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비홍치’는 기러기를 날려 보내는 고갯마루라는 지명이다.
이씨부인은 비홍치에서 버드나무 세 가지를 꺾어 나무오리 세 마리를 만들어 날려 보냈다. 첫 번째로 날려 보낸 나무오리는 적성면 운림리 농소막으로 떨어지고, 또 한 마리는 동계면 구미리(龜尾里) 녹갈암(鹿渴岩)으로, 또 한 마리는 인계면 마흘리에 떨어졌다. 잠시 후에 되돌아온 세 마리 나무 기러기를 살펴보고, 구미리 녹갈암 터는 내 자손이 대대로 복록을 누릴 터로다 하며, 곧바로 그곳을 찾아갔다.
이와 같은 택지법은 고려시대에 사찰 터를 택할 때 쓰는 술법이었다고 한다. 이씨부인의 택지에 따라 농소막에는 그녀의 무덤이 조성되었고, 구미리는 자손들이 복록을 누릴 생거지지(生居之地)가 되었으며, 마흘리는 인계면의 명당으로 길지(吉地)가 되었다. 
이씨부인은 부귀영화를 누릴 땅보다 자손들이 백세 되도록 복록을 누릴 곳에 터를 잡았다. 녹갈암은 구미리의 주산인 무량산(구악산)에서 내려온 지기(地氣)가 뭉쳐 있는 곳이다. 그 기운이 남원양씨의 종택을 이루게 되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부인의 행실을 알게 된 세조가 1467년(세조13) 정려를 내려 후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했다. 비와 정려각은 이로부터 200여년이 지난 1774년(영조 50)에 건립되었다. 현존 건물은 1850년(철종 1)에 중건한 것이다. 구미리 마을 입구에 그 정려가 자리하고 있다. 대체로 효자 열부의 정려는 부모 봉양이 우선적인 가치 기준이지만, 이씨부인은 정절과 자손 번창의 공로를 인정받아 정려를 받은 특이한 사례이다. 

 

▲고려 직제학 양수생 처 열부 이씨려.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전 사진

남원양씨 종중문서 일괄

구미리 남원양씨 종중문서 일괄(南原楊氏宗中文書一括)은 1981년 7월 15일 보물 제725호로 지정되었다. 이씨부인이 가슴에 품고 내려온 과거 합격증 홍패(紅牌) 2매와 교지(敎旨) 5매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양이시(남원양씨 순창입향조 양사보의 조부) 급제 홍패는 붉은색의 두꺼운 한지에 붓글씨로 기록했다. 양수생(양사보 부친) 급제 홍패는 붉은색 한지에 붓글씨로 썼다. 남원양씨 종중문서 일괄은 고려 말에서 조선 전기의 홍패, 백패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특히 양이시 급제 홍패와 양수생 급제 홍패는 조선 시대의 합격증서에 교지라 쓴 것과는 달리 왕명이라 기록되어 있다. 시험관의 관직, 성명 등이 기록되어 있어 문서형식과 고려시대 과거제도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남원양씨 종중문서
▲그 중 양이시 과거합격증(교지)

 

거북바위

예로부터 우리 민족에게 거북은 장수뿐만 아니라 재물을 가져다주는 상서로운 동물로 여겨져 왔다. 사신도(四神圖)에도 등장하는데 북쪽 현무(玄武)에 거북이 배치된다. 일반적으로 거북의 머리가 향해 있는 방향은 좋지 않고 거북의 꼬리가 향해 있는 방향이 재물복이 있다고 한다. 
구미리 거북바위는 적성강(섬진강)을 건너 구미리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다. 거북의 머리 부분이 마을 밖으로 향하고 꼬리 부분이 마을을 향하고 있다. 구미리 거북바위는 거북 형상을 꼭 닮은 자연석이다. 머리 부분은 잘린 상태이나 몸체와 발, 꼬리 부분은 매우 정교할 만큼 조형성이 뛰어난 거북 형상을 하고 있다. 길이는 150센티미터(㎝), 높이는 100㎝ 정도 된다. 구미리 거북바위는 고려 후기 이씨부인이 구미리에 입향할 때, 술사들이 마을 풍수를 보고 재물 운이 약한 것을 보완해 마을 입구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거북바위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만수탄 건너편에는 우두봉이 있고, 그 너머에 취암산이 있는데, 취암산 골짜기에는 절이 하나 있었다. 거북바위의 꼬리 방향을 두고 마을 사람들과 근처 취암사 승려들 사이에 심한 싸움이 있었다. 서로 거북의 꼬리를 마을이나 절 쪽으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싸움에서 불리해진 취암사 승려들이 거북이의 목을 잘랐다. 그 뒤 1600년경에 취암사는 망해 버리고 구미리는 번창했다.

▲1930년경 구미리 거북바위.
▲현재 구미리 거북바위.

 

칠성바위

구미리 칠성바위는 마을 앞 안산에 위치한다. 칠성바위가 위치하는 곳은 ‘한 일(一)’ 자형의 지대 위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여러 개의 바위 윗면 평평한 곳에 북두칠성이 조각되어 있다. 가로 2미터(m), 세로 2m, 높이 1m 정도 되는 바위에 겹성 혈과 같이 둥근바위 구멍을 새기고 바위 구멍끼리 연결해 북두칠성을 표현했다.구미리 칠성바위는 구미리에 거주하는 주민 가운데 과거시험을 앞둔 가족들이 찾아가 합격을 기원하는 의례를 거행하는 곳이었다. 도교에서 북두칠성은 과거급제를 관장하는 문창제군(文昌帝君ㆍ학문의 신)으로 조선시대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이 선호했다. 북두칠성을 새긴 칠성바위는 구미리 남원양씨 가문에서 유생들의 합격을 기원했던 문형 유적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소중한 유산이다.

▲칠성바위.

형제바위와 구암정

무량산 기슭 만수탄(萬壽灘) 천변을 강바람 따라 걷다 보면 덕망 높은 선비였던 양배(楊培)ㆍ양돈 형제가 노닐던 흔적을 접할 수 있다. 양배와 양돈은 친형제였으나 동생이 양자를 가면서 종형제간이 되었다. 우애가 극진했던 형제는 연산군 때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무오ㆍ갑자 사화로 어진 사람이 떼죽음 당한 것을 보고 벼슬길에 환멸을 느껴 낙향해 대자연과 벗하며 지냈다. 
정자 앞 물길에는 “물소리 저 혼자 가게 두고 강가 바위에 앉아 놀아보리라” 했던 이들 형제가 의좋게 앉아 낚시를 즐기고 시를 읊던 두 바위가 있다. 
형이 앉았던 바위를 그 이름을 따라 양배의 배, 배암(배바위)이라 하고 동생이 앉았던 바위를 양돈의 돈, 돈암(돈바위)이라고 부른다. 합쳐서는 형제바위라 부르고 있다.
후손들은 양배의 학문과 덕망을 추모하기 위해 1808년(순조 8)에 적성면 지북리에 지계서원(芝溪書院)을 세워 그를 배향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헐려진 후 그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1901년(광무 5) 호를 따서 구암정(龜岩亭)을 지어 그를 기리고 있다. 양돈에게는 광제정(光霽亭ㆍ임실군 삼계면 세심리)을 지어서 추앙했다. 
구암정(龜岩亭)은 동계면 장군목길 1028에 위치하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내부에 중앙의 재실형으로 되어있다. 1990년 7월 2일 전라북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31호로 지정되었다.

▲동계면 장군목길 1028에 위치하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내부에 중앙의 재실형으로 되어있는 구암정. 1990년 7월 2일 전라북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31호로 지정되었다.
▲양배ㆍ양돈 형제가 노닐던 형제바위.

육로암과 종호암

형제바위를 지나 만수탄을 따라 가다보면 강변에는 두 개의 큰 바위 육로암과 종호암이 있다. 육로암은 여섯 명의 늙은 선인이 둘러앉아 술을 마셨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종호암은 여섯 선인 중의 한 명인 참봉 양운거(楊雲擧)가 주전자 대신 술동이로 썼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돌아가며 한 수씩 시를 읊으며 술을 마시는데, 술 주전자가 너무 작아 거듭 술을 채워야 하니 번거로웠다. 이에 양운거는 바위를 파서 술 항아리를 만들었다. 조그마한 술 주전자 대신 바위 항아리에 술을 가득 채우고, 그 위에 잔을 띄워 놓았다. 여기에 시객들이 둘러앉아 목이 마르면 술로 목을 축여가며 시가(詩歌)를 서로 주고받으며 읊었다. 
지금도 바위에는 절구통만한 구멍이 파여 있다. 예전에는 종호암 부근에 종호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석문(石門)’이라는 글자만이 바위에 남아 있어 당시 선비들의 풍류와 호연지기를 짐작할 뿐이다.

▲육로암과 종호암.
▲‘석문’ 안내판.


한응성 묘비

한응성(韓應聖ㆍ1557~1592)은 임실군 삼계면에서 태어났으나 구미리 남원양씨 16세(世) 생원공 양순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처가봉사했다. 임진왜란 때 스승인 조헌(趙憲)이 의병을 일으키자 가산을 정리해 하인 수십 명을 데리고 합세했다. 금산전투에서 선봉이 되어 싸우다가 칠백의사(七百義士)와 함께 전사했다. 
이때 수행했던 노비 부협(夫脅)은 한응성의 시신을 수습해 구미리에 돌아와 장사를 치른 뒤 자신이 주인을 잘 모시지 못해 죽게 했다며 자결했다. 그 후 타고 갔던 말도 피로에 지쳐 죽었다고 한다. 한응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892년(고종 29) 정려를 명하고, 이조 참의에 추증했다. 
구암정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구미리 가파른 산기슭에 묘와 묘비가 세워져 있다. 1876년(고종 13) 10세손인 한성엽, 한동엽 등이 세웠다.
 인계면 노동리에도 한응성 충의비가 있다. 비석 앞에는 부협의 의로움을 기린 ‘충노 부협지비’와 ‘마총비’도 세워져 있다. 2019년 1월 30일 순창군 향토문화유산 유형문화제 제1호로 지정되었다.

▲한응성 묘비와 충노 부협지비, 마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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