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5) 쌍치면 둔전리, 역사적 발자취 간직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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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5) 쌍치면 둔전리, 역사적 발자취 간직한 마을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7.08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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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이야기(5)
훈몽재 영광정 등 다수 유적

둔전리(屯田里)는 쌍치면에 속하는 법정리다. 훈몽재(訓蒙齋)ㆍ대학암(大學巖)ㆍ어암서원(魚巖書院)ㆍ영광정(迎狂亭) 등의 역사적 발자취를 간직한 마을이다. 
북쪽으로 시산리, 동쪽으로 도고리, 남쪽으로 복흥면 하리, 서쪽으로는 복흥면 서마리와 경계를 이룬다. 

마을 유래와 현황

둔전(屯田)이란 군사 요충지에 주둔한 군대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경작하는 토지다. 976년(고려 경종 1) 군사 훈련장 부근 막사 자리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병사들의 군량미 확보를 위한 논밭이 있는 곳이라서 둔전리라 부르게 되었다. 둔전리는 어암(魚岩), 모래등, 사기점, 송정장, 원둔전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치등면(上置等面)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쌍치면에 편입되었다. 2020년 4월 1일 기준 둔전리의 인구는 40가구, 70명(남 34, 여 36)이다. 

▲둔전리 마을 전경.

호남 유학의 산실 훈몽재

순창은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 수가 전주, 남원, 부안에 이어 네 번째로 많았을 정도로 유학의 전통이 오래된 지역이었다. 순창 유학의 학맥은 순창읍을 중심으로 신말주 후손과 문인에 의해 전해진 일맥, 동계면과 적성면을 중심으로 남원양씨 양사형 집안을 중심으로 이어진 일맥, 쌍치면과 복흥면을 중심으로 김인후 문인ㆍ후손에 의해 전해진 일맥으로 나눌 수 있다. 조선시대 순창에는 화산서원ㆍ무이서원ㆍ지계서원ㆍ어암서원 등 4개 서원이 있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후 철거되어 현재는 남아 있지 않지만, 유학의 맥은 순창향교(1413년 건립)와 훈몽재(訓蒙齋)를 통해 계승되고 있다.
‘호남 남쪽에는 김인후, 호남 북쪽에는 이항, 영남에는 이황, 충청에는 조식, 서울에는 이이가 버티고 있다’는 역사서의 기록처럼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ㆍ1510~1560)는 조선 성리학의 거목이다. 그의 성리학설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으로 주리론(主理論) 입장이었으며, 수행론 방면으로는 ‘경(敬)’을 강조했고, 그의 학문은 의리를 실천하는 데에 있다. 그는 순창 유학의 시조일 뿐만 아니라 호남 유학의 토대를 쌓게 한 학자라 할 수 있다.
훈몽재는 김인후가 39세 되던 1548년(명종 3)에 부인의 고향인 쌍치면 점암촌 백방산 자락에 지은 강학당이다. 김인후가 처음 훈몽재를 지은 곳은 대학암(大學巖) 위쪽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돼 5세손인 자연당 김시서(金時瑞ㆍ1652~1707)가 1680년(숙종 6)에 원래의 터 인근에 자연당을 짓고 기거하며 훈몽재를 중건해 후학을 양성했다. 일제강점기에 중건했으나 1951년 6ㆍ25 전쟁 때 소실되었다. 이후 순창군에서 김인후의 학문적 업적과 정신을 되살리고 전통문화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2009년 11월 9일 현재 위치에 훈몽재를 중건했다. 2012년 11월 2일 조선시대 훈몽재 터인 훈몽재 유지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어리석음을 깨우친다는 훈몽재(강학당), 김시서가 자연당이라는 이름으로 복원한 자연당(숙박 시설), 김인후의 교육이념인 ‘몽이양정(蒙而養正, 어리석은 사람을 바르게 기름)’에서 따와 이름 붙인 양정관(교육관ㆍ숙박시설), 김인후의 문학적 사상인 산(山)ㆍ수(水)ㆍ인(人)의 삼연(三然)을 구현한 삼연정(누정) 등으로 구성돼 있다. 

▲김인후가 39세 되던 1548년(명종 3)에 부인의 고향인 쌍치면 점암촌 백방산 자락에 지은 강학당인 훈몽재.

김인후 유허비

김인후 유허비(遺墟碑)는 김인후가 순창에서 훈몽재를 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활동한 내력을 기념하기 위해 개항기인 1868년(고종 5) 후손들이 세웠다. 둔전리 어암마을과 점암마을 중간 지점 밭 가운데에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70센티미터(㎝), 너비 62㎝, 두께 21㎝이고 재질은 화강암이다. 전면에 ‘문정공 하서 김선생 유허비(文正公河西金先生遺墟碑)’라 새겨져 있다. 음기(陰記)는 해서체로 새겼는데 자세한 내용은 마모되어 확인할 수 없다. 본래 둔전리 45번지 훈몽재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김인후 유허비.

송강 정철과 ‘대학암’, ‘정철 배미’ 

송강(松江) 정철(鄭澈ㆍ1536년∼1594)은 조선시대 중기 선조 때 좌의정 등을 지낸 문신이자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1인자다.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 당시 국문(鞠問)을 주관해 동인(東人) 무리들을 가혹하게 처리하며 많은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성산별곡>ㆍ<관동별곡>ㆍ<사미인곡>ㆍ<속미인곡> 등 주옥같은 가사문학과 <훈민가>ㆍ<장진주사>(최초의 사설시조) 등 시조와 한시를 남겼다.
그의 맏누이가 인종(仁宗)의 후궁인 귀인(貴人)이었고, 둘째 누이가 왕족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瑠)의 부인이 되었기에 어려서부터 궁중에 출입했다. 어린 경원대군(후일 명종)과 친숙해졌고 명종이 즉위하자 총애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인종이 죽고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1547년(명종 2년) 양재역 벽서 사건에 둘째 매형과 아버지 정유침이 연루돼 유배되었다. 정철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를 전전하게 되었고, 1551년(명종 6년)에 아버지가 특별사면 되자 온 가족이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군 창평으로 이주했다. 이후 김윤제, 임억령, 송순 문하에서 시와 학문을 배웠다. 
송강 정철은 소년 시절 훈몽재에서 김인후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훈몽재 앞에 흐르는 추령 천변에 대학암(大學巖)이 있다. 정철은 자신의 친필로 ‘대학암’이라 암각해 그 흔적을 남겼다. 대학암은 선비들의 풍류를 느낄 수 있는 상징물이다. 흘러오는 청천한 물과 주변의 절경이 어우러져 학동들이 시를 짓는 상상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장소다. 30여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평평하고 넓은 바위다. 훗날 단암 민진원(丹巖 閨鎭遠)이 자연당(自然堂) 김시서(金昌夏)를 찾아와 대학암에서 김인후와 정철에 대해 “상국께서 수학한 바윗돌을 매만지니 / 두 노옹이 남긴 향기 영원히 흠양되네” 라는 시를 지었다. 
송정자마을 둔전교에서 훈몽재 사이 중간쯤 되는 청남들에 ‘정철 배미’가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정철 집안에서 소작에게 농사짓게 한 뒤 수확된 곡식 중 소작료를 제하고 나머지는 강미(講米ㆍ수강료)로 기부했던 것 같다. 

▲대학암.
▲‘정철 배미’로 전하는 청남들 논.

어암서원

1827년(순조 27) 순창 유림의 공의(公議)로 김인후, 이이, 정철, 김시서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훈몽재 옆에 어암서원을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어암서원(魚巖書院)이란 명칭은 점암(鮎巖)의 점(鮎)에서 ‘점(占)’을 빼고 지은 것으로 보인다. 마을 앞 바위가 있는 소(沼)에서 물고기를 잡았다고 하여 어암사(漁巖祠)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창건된 이후 어암서원은 선현에게 제사를 올리며 유교 교육의 일익을 담당했으나, 1876년(고종 13)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훼철(毁撤ㆍ헐어서 치워 버림)되었다. 이에 김인후와 이이의 위패는 순창향교, 정철의 위패는 창평(昌平) 동강서원(東江書院), 김시서의 위패는 어암서원 터에 매안(埋安ㆍ신주를 무덤 앞에 묻음)했다. 서원은 복원하지 못하고, 둔전마을에 어암서원 유허비(魚巖書院遺墟碑)를 세웠다.

▲어암서원 유허비.

영광정

1910년 일본에 국권을 강탈당하자 금옹(錦翁) 김원중(金源中ㆍ1860~1930)은 뜻을 같이하는 동지 7명과 함께 광인 행세를 하면서 은밀하게 의병을 모집하고 물자를 준비해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21년 6월 27일 항일운동의 집회 장소였던 자리에 애국동지 8명의 뜻을 높이 기리기 위해 정자를 세우고, 처마 끝에 태극팔괘(太極八卦)를 새겨 망국의 설움을 되새기며 정자 이름을 영광정(迎狂亭)이라 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씽치면내 거의 모든 건물이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는데 영광정은 소실되지 않았다. 1974년 군내 유림들이 건물을 보수했고, 1991년 담양~정읍 간 도로 확장 공사 때 건물이 입을 피해를 막기 위해 영광정을 해체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정면과 측면에는 누정 이름을 새긴 현판 두 점이 걸려 있는데, 모두 김원중의 친필이다. 1990년 6월 30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영광정은 쌍치면 소재지에서 시산마을을 지나 정읍 방향으로 따라가다 둔전교 못 미쳐 기룡암(용암) 위 냇가에 있다. 

▲영광정.

들독놀이

둔전리 동구 앞 정자나무 아래에는 들독놀이에 쓰인 돌이 놓여 있다. 달걀 모양처럼 둥글면서 약간 긴 이 돌은 130근(78㎏) 정도다. 들독놀이는 한국식 역도로 농경사회에 쓰였던 중요한 민속자료다. 칠석이나 백중 날에 청장년들이 한 해 농사의 피로를 풀기 위해 풍물을 치면서 크고 작은 들돌을 들어 올리며 힘을 평가하고 즐기는 민속놀이의 하나였다. 옛날 머슴들의 새경을 정하는 구실도 했다고 한다. 

메기 바위와 송아지

옛날 둔전리 천변 큰 바위 밑에 수백 년 된 거대한 메기가 살았다. 어느 여름 한 농부가 송아지를 길들이려고 물가에 말뚝을 박아 송아지를 묶어 놓은 뒤 뒷산에 올라가 꼴을 베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억수 같은 소나기가 퍼붓더니 냇물이 순식간에 불어났다. 이때 메기가 펄쩍 뛰어올라 송아지를 삼키고는 다시 바위 굴속으로 숨었다. 송아지 주인이 달려와 말뚝에 감긴 줄을 당겼더니 송아지 대신 어마어마하게 큰 메기가 줄에 낚여 올라왔다. 이 일로 인해 바위 이름을 ‘메기바위’라 하고, 마을 이름을 한자로 점암촌, 냇물은 점암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 점암천은 다양한 모양의 크고 작은 바위들이 많아 바위 틈새에 메기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 

둔전리 가마터

둔전리에 두 개의 가마터가 있다. 하나는 어암마을에서 장군봉 쪽으로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김인후 유허비 부근에 자기 조각이 넓게 흩어져 있다. 다른 하나는 사기점마을에서 남동쪽으로 1.5㎞ 가량 떨어진 도둑골 일대에 자기 조각이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다. 1989년 지표 조사 때는 흙을 반죽하는 데 사용된 확(도구)이 밭에 남아 있을 정도로 유적의 보존 상태가 양호했는데, 지금은 밭에 소량의 자기 조각만 흩어져 있다. 


어암ㆍ송정자 고인돌

둔전리 어암마을에서 북쪽으로 250미터 가량 떨어진 장군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시작되는 안산골 어귀 밭에 고인돌 3기가 있다. 1호 고인돌(덮개돌 길이 240㎝, 너비 140㎝, 두께 25㎝)은 남북으로 장축 방향을 두었으며, 2호(160×80×30㎝)는 방산천과 평행되게 동서로 장축 방향을 두고, 3호(280×240×40㎝)는 남북으로 장축 방향을 두었다. 1ㆍ2ㆍ3호 모두 굄돌은 확인되지 않았다. 추령천에서 서쪽으로 50미터 가량 떨어진 비교적 완만한 지형을 이룬 밭에 송정자 고인돌 1기가 있다. 남북으로 장축 방향을 두었으며, 굄돌은 확인되지 않았다. 덮개돌은 길이 2250㎝, 너비 157㎝, 두께 75㎝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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