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분다(32)/ 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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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분다(32)/ 합주
  • 선산곡
  • 승인 2020.07.15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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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주(合奏)

초여름의 저물어가는 한촌에 비가 내린다. 고개 들어 바라보는 산마루에 비안개가 자욱하다. 쏴아. 숲을 적시는 소리가 들린다. 창가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그 빗소리를 듣는다. 열어 놓은 창으로 드는 빗발. 크게 난 동쪽 창문은 비가 오면 으레 빗발이 들이친다.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빗소리를 듣는 이유는 ‘쏴아-’라는 소리를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부사(副詞)의 적절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저 정도의 빗발이면 잠시 후 냇물에서 불어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빗소리와 물소리는 종종 그렇게 만난다. 천천히,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
잔느 모로와 장 폴 벨몽도가 출연했던 프랑스영화 <모데라토 칸타빌레>. 1958년 마르그리드 뒤라스가 발표한 소설이 원작이다. 1960년 영화화된 그 작품에 잔느 모로가 출연한 것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제인 마치와 양가휘가 주연했던 영화 <연인>에서는 나레이션을 맡았고 뒤라스의 전기영화 <사랑>에서는 뒤라스 역을 맡았다. 소설이건 영화이건 뒤라스에 관해 잔느 모로는 단골, 적격배우인 셈이다. 
몇 년 전 그가 죽었다는 날, 비가 내렸다. 아니 죽었다는 것을 안 날 내린 비였다. 계절은 여름이었지만 묘한 한기를 불러일으키는 그의 부음이었다. 비극적 결말을 보이는 연인들의 우연한 만남에 비 빼놓고는 무엇이 더 어울릴 수 있으랴. 영화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을 그때 나는 떠올렸다. 제목이 <빗속의 해후>.
소설도 보지 못했고 영화도 보지 못했지만, 그 음악 트랙이 어딘가 있었다. 시디는 금방 찾았다. 피아노 선율이 모데라토 칸타빌레로 흐른다.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 <빗속의 해후>를 들으며 다시 의자에 앉아 비 오는 풍경을 본다. 예측한 대로 계곡의 물소리가 제법 커지기 시작했다.
동쪽 마당 한쪽에 심은 목백합도 비에 젖었다. 빗방울을 떨어뜨리는 나무 잎사귀를 바라보는 마음은 흡족하다. 오래전 뒷집에 심어진 손가락만 한 굵기의 나무를 얻어 옮겨온 것이다. 터를 옮긴 탓인지 몸살을 앓듯 제자리에서 비실거리던 나무의 키는 몇 년이 지나도록 내 가슴에도 미치지 못했다. 어서 좀 커다오, 내 간절함을 알아챘는지 작년부턴가 나무가 쑥쑥 자라 이제는 3, 4미터 정도, 마치 건장한 청년을 연상하는 몸이 되었다. 6, 7년만의 일이다. 생육을 위해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지만 그 나무만큼은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땅에서 30센티 정도까지 가지를 뻗어 내린 나무의 자태는 말 그대로 우아하다. 자칭 타칭 정원박사, 나무박사들이 뒷집을 놀러 와서 ‘못 써! 저거!’ 했다는 말을 듣고 은근히 부아가 나기도 했다. 그 집 여기저기 제법 키워낸 나무들이 땅을 습하게 한다는 이유로 자르게 했다는 박사님들이었다. 그 말을 듣고 하루아침에 나무들을 잘라버린 뒷집 박 사장도 그렇지만 내 집에 서 있는 몇 그루 나무들을 보고 이러쿵저러쿵 쓰네, 못쓰네 했다는 말이 영 달갑지 않았다. 
목백합은 내가 좋아하는 나무다. 잎사귀가 큰 이유도 있지만 큰 나무치고 꽃을 피우는 것도 장점 중의 하나다. 내 집 뜰 곳곳에 일곱 그루의 목백합이 서 있다. 주차장 옆에 서 있는 세 그루는 하늘 높이 자랐지만, 아직 꽃이 피지는 않는다. 그러나 언젠가 꽃을 피우면 나무의 진가는 드러날 것이다. 지금 창가에서 바라보는 저 나무의 밑동 그늘에서 언젠가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볼 꿈에 젖어있다. 
합주(合奏). 나무를 바라보는 시선에 맞추어 빗소리와 계곡의 물소리, 피아노 선율이 안단테 칸타빌레로 흐른다,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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